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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적운 Mar 23. 2022

나는 왜 폐쇄 병동에 돌아왔는가?

웰컴 백, 폐쇄 병동!


2021년 1월 중순, 퇴근 시간대를 살짝 지난 오후 여덟 시쯤, 나는 응급차를 타고 서울 어드메에 있는 S병원에 왔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찾은 적 없는 병원이었다. 구급대원의 연락을 받은 가족들은 급하게 병원으로 왔고, 응급실 침상에 누워 곯아떨어진 이십 대 중반 여성, 그러니까 그들이 (아마도) 사랑하는 딸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이다.     




본래 나는 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인 Y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처음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이후, 약 4년 간 여러 로컬 병원을 전전하다 도착한 곳이었다. 엄마가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엄마는 예전부터 병원의 크기나 의료진의 수로 병원이 얼마나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하곤 했다.


내 첫 진단은 우울증이었고, 그 이후에는 공황장애나 불안장애 같은 이름이 덧붙었다가, Y병원에 갔을 때 조울증으로 갑작스레 이름이 변화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극성 장애 2형. 그 뒤에는 불안장애와 경계성 성격장애까지. 와!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당시 나에게 붙는 이름들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약을 주면 주는구나, 먹으라고 하면 먹는구나, 요즘 어떠냐 묻는 의사의 질문에는 그냥 그래요, 약 부작용은 없냐 물으면 없는 것 같아요. 내 진료는 정확히 삼 분 컷이었다. 삼십 분을 기다려서 삼 분 진료라니. 그때의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때의 나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 진단명을 바꿔 준 Y병원의 명의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나의 알코올과 관련된 문제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의 1월 1일부터 필름이 끊길 정도로 부어라 마셔라 해댄 나의 냉장고에는 늘 소주병과 맥주 캔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다 이유 없이 편의점에 들러 소주를 산 적도 많았고,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3차, 4차까지 신이 나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 적도 많았다. (아직까지 길바닥에서 잠을 자지 않은 게 대단할 정도다) 문제는 내가 이런 얘기를 병원에서 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S병원에 처음 간 (실려 간) 날, 나는 혼자서 소주 한 병 반에 맥주 두 병을 해치운 후였다. 술에 취한 나는 충동 조절이 불가능한 상태에 다다랐고, 늘 내가 꿈에서만 해 오던 짓을 해 버렸다. 일주일치 약봉투를 한 번에 뜯어…… (이하 생략)


S병원에 도착한 이후부터 다음 날 점심쯤까지, 잠인지 약인지 술인지 셋 중 하나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응급실에서 이틀, 중환자실에서 사흘을 보낸 뒤 폐쇄 병동으로 갔다. 폐쇄 병동 입원이 결정된 후, 나는 입원하고 싶지 않다며 엉엉 울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찌르는 소변줄과 며칠째 씻지 못해 찝찝한 이 기분을 느끼는 게 차라리 낫다고. 그것도 훨씬, 몇십 배는 낫다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의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과 부모님은 나를 입원시키기로 일찌감치 결정하였다. 나는 휠체어를 탄 채 소심하게 훌쩍훌쩍 울면서 폐쇄 병동으로 향했다. (후술하겠지만 폐쇄 병동의 입원 방식에는 자의 입원, 동의 입원, 그리고 보호 입원이 있고, 나는 당시 동의 입원이었다.)


폐쇄 병동에서의 열흘 동안, 나는 중환자실에서와 휠체어에서의 눈물이 민망해질 만큼 괜찮게 보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긴 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약을 조정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면담을 진행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아니, 사실은 다 거짓말이었다. 난 최대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게 한 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이 병동을 벗어나고 싶었다. 병동이 싫은 건 아니었다. 너무도 충동적이고 급작스러운 결정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기에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기도 했고, 당장 병동 밖으로 나가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도 했다. 그 어떤 면담을 할 때든 나는 다 괜찮다, 좋다, 이제 나가면 될 것 같다, 퇴원하고 싶다 같은 말만 했고, 환자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며 유명하신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결국 매우 빠른 시일 내에 나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내 면담을 담당하셨던 전공의 선생님께서는 걱정 어린 말투로 말씀하셨다. “전 너무 섣부르다고 보긴 하지만…… 교수님께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니……”     



전공의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퇴원 후, 나는 어느 정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아주 많은 시간을 우는 데 허비했고, 우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면서 또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리고 외래 진료를 가서는 뭐로 찍어낸 것처럼 언제 선생님을 뵙든 “그냥 그랬어요, 네, 괜찮아요, 다음 주에 뵐게요,”라고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주치의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외래 진료 시간이 짧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내가 선생님의 질문에 굉장히 짧은 답만 하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자주 깼고, 다시 잠들기까지 오래 걸렸다. 과호흡이 자주 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에게 오는 연락이 무서웠다. 화를 자주 냈고, 모든 것을 부수고 싶단 생각을 했고, 무기력함이 나아지지를 않았다. 21년 2학기에 중도 휴학을 했고, 겨울 계절학기도 철회했다.


무엇보다도, 지금보다 내가 훨씬 더 아프길 바랐다. 죽도록 아프길 바랐다. 그래서 내가 입원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쯤에서야 생각했다. 나, 재입원하고 싶은 거구나.



나에게 입원은 도망에 가까웠다. 지금 이 현실에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나를 병원에 넣어 고립시켜야 했다. 그 무엇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나를 숨겨야 했다. 한 번  ‘입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계속 입원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어느 겨울의 외래 진료 날, 나는 굉장히 견고한 줄로만 알았던 마음속 유리벽을 와장창 깨버리고는 교수님께 울며불며 애원했다. “선생님, 저 제발 입원시켜 주세요.” 그때 교수님은 느릿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입원도 하나의 방법이지요.”     


그날 나는 곧장 입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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