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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적운 May 12. 2022

진정한 치료의 시작

다시 시작된 병동에서의 일상

2022년 1월 27일, 입원 3일 차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 해방되고 싶은 걸까. 왜 자유를 죽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걸까.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건 어째서일까. 왜 나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 이유는 찾아내지 못하는 걸까. 사는 게 존나 힘들다고 외치던 술 취한 나에게 묻고 싶다. 그럼 그 애는 “그냥 다 힘들어!”라고 말하겠지.


내가 아는 죽음과 모르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죽음이 있다.

샤워 중간, 갑작스럽게 물이 차가워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누군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물을 틀었구나. 어디일까. 어느 방의 세면대? 어느 화장실의 세면대? 그 사람은 살아 있구나.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누군가의 죽음에 죄의식을 가지고 있나. 아니다. 나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아는 죽음과 모르는 죽음이 미안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이 부분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미안해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 죽음을 미안해하지 않고 잊어버린다. 분명 누군가는 ‘왜 네가 죄의식을 가져?’라 묻겠지만, 어쨌든 나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그 많은 죽음에 대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가만히 맞고 서 있는 것도 자해일까? 이런 바보 같고 사소한 일도? 그렇다면 나는 해바라기 샤워기 아래에서 오랫동안 찬물을 맞고 서 있을 테다. 심장이 차가워져서 숨을 헐떡일 때까지. 나는 따뜻한 눈물을 흘릴 거야.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게 자해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해를 하고 싶은 거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회피하려 했던 부분을.

지난 입원 때 병동에서 잠깐이나마 친하게 지냈던 친구 A가 있다. 같은 날 퇴원을 한 A와 나는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다. (원래 퇴원 시 연락처는 절대 교환하지 말라고 한다.) 대신 우리는 짧은 악수를 했다. 밖에서 잘 지내자는 의미의 응원이 담겨 있는 악수였다. 그리고 몇 달 뒤 A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과 동시에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다가온 감정은, 이기적이게도, ‘나 역시도 잘 지내지 못하겠구나’였다.

아침부터 계속 생각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다고. 해바라기 샤워기 밑에서 물을 맞으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까. 선생님, 저는 지금 고민이 있어요. 어떤 죽음은 내가 아는 죽음이고 어떤 죽음은 내가 모르는 죽음이죠. 내가 모르는 수많은 죽음에게 느끼는 죄책감과 죄의식. 아뇨 어쩌면 저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해요. 미안해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그러니까요 저는 그 죽음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나도 잘 못 지내겠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잘 지내는 게 맞나 싶고, 그 죽음을 자꾸 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만 쓰는 것 같고. 그러니까요 선생님. 극복이라는 말이 웃기지만요, 이 말은 바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하는 게 그 사람에게도 선생님께도 실례일까 봐 겁이 났다. 그런데 마침 선생님께서 오늘 면담을 진행하자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잘 지내냐, 요즘 어떠냐, 최근 많이 하는 생각이 무어냐 등을 물으셨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도 하셨고. 그냥 대부분의 의료진이 나한테 묻는 질문과 같았다. 아침에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는 말 빼고는. 선생님은 그 말과 함께, 그래서 아침 프로그램 때 굳이 부르러 안 갔어요,라고 하셨다.

면담이 끝나갈 때쯤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불안에 잠식된 몸이 달달 떨렸다. 눈치 채신 선생님이 다행히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또 하고 싶은 얘기 있어요?”

결국 나는 말을 뱉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A와 나에 대해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다. 나는 복지사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다. “선생님들은 더 힘드시지 않아요? 훨씬 더 많은 죽음을 듣잖아요. 어떻게 해야 해요?” 복지사 선생님은 빠르게 답했다. “어떻게 하냐고요? 애도하죠. 어떻게 치료했으면 더 좋았을까, 그 부분도 고민하죠. 그렇지만 거기서 끝이에요. 자꾸 마음에 남기려고 하면 안 돼요.”

또, 선생님은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기억하기’라는 말을 해 주셨다. “그게 애도의 방법이에요. 애도 우울 말고.” 애도 우울.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프로세스가 우울하게 진행되는 사람들은 애도 우울로 가기 쉽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회피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다. 내가 내 생각의 프로세스를 알려드렸더니 (그분의 죽음을 떠올림 → 죄책감과 슬픔과 우울 → 그 감정을 위해 그분을 사용한 건 아닌가? 하는 죄의식 → 나는 왜 이렇게 살지 → … ) 선생님은 감정을 쏟아내야 한다고 하셨다. “기억은 머리로 하는 거고, 마음으로 하면 안 돼요. 그 감정으로 기억하려 하면 안 돼요. 마음으로 느낀 것은 비워내야 해요. 회피하지 말고, 제대로.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 건 어때요?”

분리와 구분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셨다. 슬픈 건 슬픈 것이나 나의 문제는 아니다. 마음 깊이 슬퍼하되, 슬퍼했다면 이제는 흘려보낼 때다. 그러니 나는 지금 ‘다 슬퍼하기’ 위해, 혹은 ‘홀려 보내기’ 위해 연필을 움직여 무언가 적어 보려는 것이다. 마음에 고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기억하기 위해서.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 나에게 네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그런 것이 나는 필요했던 것 같다. 밖에서는 그 말을 들어도 ‘알지, 아는데……’ 하고 넘어갔으나, 이젠 정말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22년 1월을 살고 있고, 살아 있으니까.

21년 봄, A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응급실에서 울고 있는 나를 향해 말해 주고 싶다.

그 눈물을 다 비워내고 이제부터 오늘을 살아.




2022년 1월 28일, 입원 4일 차


지나가던 환자의 “오늘 28일이네”를 듣고 날짜가 실감이 났다. 오늘따라 속이 메스꺼워 아침을 조금만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3분의 1은 먹었을 텐데, 오늘은 두 숟가락 정도였다. 배가 찢어지는 느낌이 든다.

마음은 언제 찢어지는가. 짧고 뭉툭한 손톱은 팔을 아무리 할퀴어도 그 살갗을 찢어낼 수가 없다. 그래도 마음은 찢어질 수 있다.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할퀴다 보면 어느 순간 찢어진 마음이 보일 것이다.

저녁 늦은 시각, 전공의와 면담을 했다. 나 스스로 너무도 뒤처져 있고, 그런 내가 진심으로 싫다고 말씀드렸다. 뒤처져 있음을 알면서도 열심히도 하지 않는 내가 너무너무 싫다고.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느리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걸 병이라고 해요.”

다리를 다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넌 왜 달리지를 못하는 거야! 달려!’라고 말한다면? 그런데 다리를 다친 사람도,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나 자신이라면?

전공의는 이런 말씀을 해 주었다. “다리를 다친 건 저희가 치료를 할 거예요. 물론 바로 낫지는 않을 거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천천히 뼈도 붙게 하고 재활 운동도 시킬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하는 건, 환자분이시잖아요. 조금이라도 줄여 보는 게 어떻겠어요?”


주치의와도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우울증 약을 조금 더 추가하기로 했다. 붉은 반점과 간지럼증이 흔한 부작용이니 잘 지켜보라고 하셨다.

오후 프로그램은 ‘연휴 동안 할 일 체크리스트 만들기’였다. 체크리스트를 만든 후 잘 이행해서 목요일 오전 프로그램 때 가져오면 된다고 했다. 나는 정말 쉽게 할 수 있는 일들, 예를 들어 ‘매일 샤워하기’나 ‘밥 다섯 숟가락 이상 먹기’ 등을 적었다. 그러다 한 환자가 나에게 체스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해서 ‘체스 배우기’도 적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오후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면담을 신청했다. 복지사는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했고, 어느 요일이 편하냐고 물으셨다. 난 상관없다고 했고 그는 그럼 연휴 직후인 목요일에 보자고 했다. 아직도 생각이 나냐고 물으시기에 흘려보내려고 하는데 힘드네요,라고 답했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흘려보내려고 하지만 자꾸 마음에 고인 채로 두고 싶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 썩지 않을 때까지만 간직하고 싶다. 어쩌면 썩어버린 후에라도. 이 마음까지 놓아버리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평생 이 죄의식 속에서 죄스러운 마음으로 매일을 살다 죽어야 할 것 같다.


전공의와 면담 이후 많이 울었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했다. 아무도 모르길 바라며 동시에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다행히 (혹은 불행히) 누구도 몰랐다.

너무 슬퍼서 베란다로 나갔다. 완전히 가로막힌 창 너머 보이는 네온사인들. 눈이 부시도록 밝게 빛나는 그 거리와 건물들. 가만히 내려다보며 브로콜리너마저의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를 들었다. 나는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왜 울었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빠르게 끝나 버린 면담. 정작 내뱉지 못한 마음속 응어리. 죽고 싶은 마음. 뛰어내릴 수 없는 높은 벽과 창문. 외부의 수많은 자극까지…… 많은 것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그 무엇도 이유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늘만큼은 일찍 누워야겠다.




2022년 1월 29일, 입원 5일 차


연휴의 시작이다. 연휴라고 해 봤자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다. 들뜬 분위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걱정이 앞선다. 무기력하고 재미없을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좋지?

새벽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환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깼다. 간호사가 환자를 재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이불 밖으로 눈을 빼꼼 내밀고 상황을 확인하다 한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안정제를 드시는 게 낫겠냐, 다시 주무실 수 있겠냐 등을 묻는 간호사에게 나는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스테이션으로 돌아가는 간호사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도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냐며 우는 목소리가 병동에 울려 퍼졌다. 나 아닌 누군가도 이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겠지.

같은 이유로 몇 번 더 깼다. 또다시 간호사가 나를 발견해 주기를 바랐으나 이불을 가만히 뒤집어쓴 채로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 환자가 울음과 한숨이 섞인 무언가를 토해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병동을 돌아다닐 때마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불안으로 가득한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당장 안정제를 달라는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약을 먹고 자리로 돌아갔다. 삼십 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으면 꼭 얘기해 달라고 간호사가 말했다. 물이 부족했는지 약이 목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조그마한 알약이 아닌 커다란 돌덩어리가 내 몸을 짓누르고 놔주질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또 조용히 울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잠들었다.

연휴의 시작은 부란과 소란과 어지러움 그리고 목에 걸린 듯한 안정제와 함께였다. 아침부터 배가 아프다. 이것도 불안해서일까. 모든 일에 불안을 끼워 넣고 그에 불안해하기. 아무래도 내 특기에는 이런 것을 적어야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면담을 오랜 시간 동안 했다. 담당의를 붙잡고 오열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쉽게도.

어제 면담 이후 담당의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어서 아침에 보여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어제 면담 때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물으셨는데,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 음…… 같은 짧은 탄식만 내뱉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기에 그리 말씀하신 거겠지. 때문에 나는 자기 전, 리갈 패드에 선생님께 드릴 말씀을 적어 내려갔다. 첫 번째는 자주 불안해지는 내 현재 상태, 두 번째는 병동의 환자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말, 세 번째는 면담이 짧아서 불안하다는 말, 네 번째는 면담이 잦지 않아 불안하다는 말. 어떻게 보면 담당의를 괴롭히는 말들만 적은 셈이다. 다행히 담당의는 꼼꼼히 읽어 주었다.

“같이 이 종이를 읽으며 대화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가 말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마음에 싫은 티를 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게 제일 확실한 면담 방법 같아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프로세스에 대해 물었다. 나는 ‘불안 → 자해 → 신체적 고통’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아파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그러니까 그건 죄책감과 죄의식 사이의 감정이었다. 담당의는 “아프지 않기 위해 이곳에 오신 거잖아요. 이미 충분히 아프시니까요. 근데 아직 안 아프니까 자해를 하신다는 건…… 스스로의 아픔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닐까요?”라고 했다. 어디서부터 나의 죄책감이 시작됐는지 거슬러 올라가다, 고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을 신고했던 일, 내가 사람들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중학생 때 일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내는 게 너무도 오랜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담당의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말했다. “이건 꽤나 중요한 이야기들 같은데, 이걸 누구도 모른다는 게 조금 충격이네요. 저희도 처음 듣고요. 지난번 입원 때에도 말씀을 안 하셨고, 그동안 외래 다니면서도 말씀을 안 하신 거죠?”

그리고 지난 입원 때 했던 심리 검사 결과를 보여 주셨다. 다른 건 상위 10퍼센트 이내에 들지만 처리 속도가 떨어진다고 했다. 주어진 것에서 중요한 부분을 캐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건 즉, 주변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쓴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리고 부정적 자아상이 뚜렷하다고. 이 마음은 지난번 퇴원 이후로도 바뀌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담당의가 앞으로는 면담 전에 짧게라도 글을 써 오라고 했다. 아주 길게도 괜찮다고 했다. 오늘 해 보니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 마음에 든다.     


밤 열 시가 다 되었을 무렵, 물을 뜨러 방 밖으로 나갔다. 문득 마음도 몸도 불안에 지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번 그 생각을 하니 땀이 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숨을 제대로 고를 수조차 없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간호사가 다가와 약이 필요하냐 물었다. 나는 안정제를 받아먹고 잠시 밖에 앉아 있었다. 그때 붉게 부어오른 손등을 본 간호사가 나에게 왜 이렇게 부었는지, 혹시 알레르기 반응 같은 건 아닌지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그 상처는 내가 손톱으로 직접 긁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뜯은 것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급하게 간호사실로 들어간 간호사 한 분은 곧장 드레싱 용품을 들고 나오셨다. 손등에 커다란 흰 밴드를 붙여 준 간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많이 힘들어요?”

나는 그 문장 위에 드러누워 엉엉 울고 싶었다. 겨우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진정될 때까지 잠깐 밖에 있으라는 말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 결국 간호사는 나를 격리실에 데리고 갔다. 격리실은 내 생각만큼 무시무시한 공간은 아니었고, 오히려 아늑하고 포근했다. CCTV가 두 대나 있다는 사실이 그 아늑함을 깨부수긴 했지만.

방금 전과 다른 간호사가 내 이불과 베개를 들고 격리실에 왔다. 왜 그리 우냐, 불안한 이유가 있냐 등을 물으시고, 조금 더 보고 그래도 전혀 진정이 안 되면 추가 약을 먹자고 하셨다. 나는 금방 진정되지 않았다. “많이 힘들어요?”라는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 힘들어요. 힘들어서 이곳에 들어온 건데 여기서도 이렇게 힘들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죽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전공의가 들어왔다. 전공의는 나에게 효과가 빠른 안정제 주사를 맞길 권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엉덩이 주사는 생각보다 좀 더 아팠다. 주사를 맞은 후 누워 있었다. 한참을 울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격리실에서 보내다, 방에 가서 자겠다고 말씀을 드리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공용 공간을 돌아다니는 환자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전공의가 이따 새벽에 잘 주무시는지 확인하러 올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몸은 신기할 정도로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약효는 굉장했다! 현대의학의 발전에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다!


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 전공의가 나를 불러 세웠다.

“집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고 그러셨다는 게 지금이랑 비슷한 상황인 건가요?”

“네.”

“그럼 지금부터가 진정한 치료의 시작이겠네요.”

입원 5일 차. 드디어 '진짜 치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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