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욜 MaYol Nov 20. 2024

메아리 소리

mayol@hairpin 6. 지팡이

날이 밝자마자 반장의 떠드는 소리로 건물이 흔들렸다.

계단을 오르는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나와!"


보경이는 벽을 더듬어 복도로 나갔다. 다른 방에서 나온 아이가 보경이의 옷자락을 잡았다.


"따라와."


마당에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반장이 보경이의 팔을 비틀어 잡고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자, 오늘부터 신입생도 일을 나갈 거야. 모두들 정신 차리고 일하도록 해."

"네~에."


반장은 보경이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아이들을 인솔해 어디론가 한참을 끌고 갔다.

차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바쁘게 들려왔다.


"너는 여기, 그리고 너는 저기."


반장이 아이들에게 서 있을 곳을 알려주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자리가 정해지자 보경이를 데리고 좀 더 걸어갔다.


"너는 여기야. 여기 전봇대 옆이 니 자리야. 바로 뒤가 찻길이니까 전봇대를 꼭 잡고 있어."


반장이 보경이의 발 앞에 모자를 뒤집어 던져놓았다. 팔을 들자 반장의 말대로 전봇대가 만져졌다.


"데리러 올 때까지 여기 앉아 있어.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어디 갈 생각도 말고."


어디선가 빵 굽는 냄새가 보경이의 코를 자극했다. 엄마가 핫초코와 함께 내어주던 빵의 향기였다.

빗겨주지 않아 하루 사이에 엉켜버린 긴 머리카락과 여기저기에 부딪혀서 생긴 상처들 그리고 이미 후줄근해진 옷 때문에 사람들이 다가왔다가도 바로 뒤돌아 섰다. 더구나 양쪽 눈에 물려있는 개미들의 이빨이 선명한 자국을 내고 있어서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지나가며 중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어머머머, 쟤 눈이 왜 저래."

"오 마이 갓! 외계인 아니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용기를 내서 작은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집에 데려다주세요."


하지만 보경이의 떨리는 목소리는 자동차 소음에 묻혀 버렸다. 사람들은 보경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혀만 끌끌 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반장이 성큼성큼 걸어와 텅 빈 모자를 들었다.


"이게 뭐야. 한 푼도 없잖아. 너는 오늘 밥 먹을 자격이 없어!"


반장의 손에 이끌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방에 갇혔다. 밥 짓는 냄새가 올라오긴 해지만 보경이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언니들과 장난꾸러기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토실이...


'아, 그렇지.'


보경이는 머리에 꽂혀있던 머리핀을 꺼내 '딸깍 딸깍' 소리를 냈다. 토실이가 근처에 있다면 듣고 달려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몇 번 머리핀 소리를 내다가 다시 머리에 꽂으려는 때 토실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거실과 방바닥을 뛰어다니던 익숙한 소리였다.

발자국 소리는 보경이의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방문 긁는 소리가 들렸다. 보경이는 엎드려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기어갔다.


"토실아, 토실아."

"멍멍멍. 나야 나. 문 앞에 있어."

"너 어디 갔다가 온 거야."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찾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봐."

"보고 싶어, 토실아."

"나도 보고 싶어."


인기척이 들리자 토실이가 속삭였다.


"누가 오나 봐. 나 걸리면 안 되니까 아무도 없을 때 머리핀 소리를 내줘. 그리고 문이 안 잠기게 종이를 끼워놔."

"응, 알았어."


토실이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보경이는 방문에 기대앉아 토실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는 흉내를 냈다. 토실이가 머리핀 소리를 기억한다는 게 너무 고맙고 기뻤다.


날이 밝자 반장이 방문을 왈칵 열고 들어와서 지팡이를 던졌다.


"너 오늘부터 지팡이 짚고 다녀. 아무래도 지팡이를 짚어야 사람들이 널 더 불쌍하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어차피 넌 장님이잖아."

보경이는 지팡이를 짚지 않고 메아리 소리를 들었다.

일을 나가기 전에 아이들을 소집한 반장이 지난 저녁부터 굶고있던 보경이에게 비스킷 하나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자, 어제 가장 많은 돈을 벌어 온 우리 집의 보물, 재식이!"


그 말을 들은 재식이란 아이가 '어버버버' 벙어리 흉내를 내며 주인과 반장 앞으로 다가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주인은 재식이에게 포장이 벗겨진 로봇을 선물로 주었다.


"너희들도 재식이처럼 일을 잘하면 이렇게 선물을 받을 수 있어. 다들 열심히 해!"


지팡이 소리와 함께 주인과 반장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보경이는 손에 쥐었던 지팡이를 집어던졌다. 그때 한 아이가 보경이에게 다가왔다. 벙어리 흉내를 내는 재식이었다.


"야, 너는 진짜 장님이잖아. 지팡이를 짚으면 편할 거 아니야. 그리고 벙어리도 아닌데 벙어리 흉내로 돈을 버는 나보다는 훨씬 나을걸."

"나는 장님이 아니야. 개미들이 물어서 안 보이는 것뿐이라고. 절대 지팡이는 안 짚을 거야!"

"에효, 고집쟁이."


보경이는 반장이나 주인의 인기척이 느껴질 때만 지팡이를 들었다. 일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팡이는 늘 전봇대에 기대어 있었고 보경이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멀리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재식이는 반장이 올 때를 기다렸다가 보경이에게 달려가 지팡이를 짚게 했다.

주인과 반장이 다른 일로 바쁠 때는 재식이에게 인솔을 맡기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은 일을 나가는 동안 재식이가 보경이의 지팡이를 대신 들었다. 재식이는 보경이의 지팡이를 짚으며 장님에 벙어리 흉내까지 내며 아이들을 웃겼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장이 올 시간까지 재식이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돈을 구걸했다. 아무도 보경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행인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모두가 잠을 자는 한밤중이 되면 머리핀을 눌렀다.


"딸깍 딸깍."


그러면 조심스럽게 달려오는 토실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틈으로 토실이가 들어왔다. 토실이는 보경이의 품으로 뛰어올라 연신 뺨과 눈을 핥았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일은 나가지 않고 혼자 있는 날에도 머리핀 소리를 냈다. 그러면 언제든 토실이가 달려와 보경이의 품에 안겼다. 머리핀 소리를 듣고 토실이가 나타나면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는 어떻게 이 소리를 구분해서 오는 거야?"

"응. 잘 들으면 머리핀마다 소리가 달라. 어디에서 오는 소리인지도 알 수 있고. 소리에도 냄새가 있는 것 같아."

"소리에도 냄새가 있다고?"

"응. 너도 머리핀 소리를 잘 들어봐. 소리가 벽에 부딪히면 딱딱한 메아리가 되고 꽃잎에 부딪히면 부드러운 메아리가 돼. 냄새처럼 구분이 된다니까."


보경이는 토실이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토실이가 어떻게 머리핀 소리를 구분하고 찾아오는지 알고 싶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고 주인과 반장이 건물 안에서 서성거리는 날에는 방 안에서 문을 닫고 머리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딸깍 딸깍"


머리핀 소리가 어딘가에 부딪혀 희미한 메아리 소리를 내는 것이 느껴졌다. 메아리 소리를 따라가니 벽이 만져졌다. 방 여기저기를 향해 머리핀을 만졌다. 메아리 소리가 달라서 다가가보면 옅은 빛이 눈꺼풀에 맺혔다. 창문이었다. 녹슬고 용수철 소리가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와 여기저기 깎인 나무의자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꽂혀있지 않는 화병과 다 해진 보경이의 구두와 너덜 해진 실내화가 만져졌다. 방 한가운데에서 들리는 메아리와 벽에 붙어서 들리는 메아리 소리가 달랐다. 어떤 메아리는 딱딱하게 또 어떤 메아리는 부드럽게 들렸다. 빠르게 돌아오는 메아리도 있었고 천천히 되돌아오는 메아리도 있었다. 신기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