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욜 MaYol Nov 13. 2024

고향

mayol@hairpin #5  주인님과 반장님

개천가의 계단에 다다르자 토실이가 꼬리에 힘을 주었다.


"꽉 잡아. 여기부터 계단이야."

"계단이 몇 개야?"

"하나, 둘, 셋... 일곱 개야."


토실이는 보경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계단의 수를 세었다. 계단을 내려서자 주변을 끙끙거리며 개미를 찾았다. 보경이가 눈을 떠 보려고 애를 썼지만 뻑뻑하기만 할 뿐 떠지지는 않았다.


"좀 더 올라가 보자."


산책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우측으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좌측 계단 위로는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토실이의 꼬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작은 물웅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어느새 보경이의 하얀 드레스와 빨간색 에나멜 구두는 지저분하게 얼룩지고 있었다.

고양이가 쫓아오는지 멀리서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개미들이 보이질 않네."


당황하는 토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경이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의 품에 안겨 지나던 폭포가 분명했다. 가까워지는 폭포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토실이가 어딘가에 코를 대고 끙끙거리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토실아, 개미 찾았어?"

"아니, 여기가 엄마를 만난 곳이야. 비를 맞으며 떨고 있던 내 냄새가 아직도 나. 두려움과 슬픔의 냄새야. 엄마의 냄새도 나. 나를 끌어안던 엄마의 따뜻한 냄새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어."


토실이는 그렇게 한참 동안 자신이 버려졌던 그곳의 냄새와 엄마의 냄새를 맡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꼬리를 흔들었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 애기 때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해."

"응. 나는 과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어떻게 과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건지 신기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걷지 않아서 토실이의 꼬리가 다시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꼬리를 잡을 수 없게 작아져 버렸다.


"토실아, 너 어딨어?"


토실이의 꼬리를 찾으려고 주변을 더듬었지만 만져지는 건 흙과 돌뿐이었다. 보경이는 머리에 꽂혀있던 머리핀을 빼서 소리를 냈다. 그러자 토실이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멍멍. 여기야, 여기."


땅에 발바닥을 비비듯이 조심스럽게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걸었다. 토실이의 푹신한 엉덩이가 발등에서 느껴졌다. 허리를 숙여 토실이를 만졌다.


"어머머, 너 다시 작아진 거야?"

"나도 모르겠어. 왜 다시 작아지는 건지."


머리핀을 머리에 꽂고 토실이를 안아 올렸다.


"으이구, 우리 토실이. 다시 애기가 됐네. 호호."


보경이는 토실이의 안내에 따라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폭포에서 흩어진 물들이 안개비처럼 보경이와 토실이의 몸을 적셨다.


"토실아. 이제 집에 가자. 개미가 없는 것 같아. 집에서 기다리자."


폭포 소리가 무서웠는지 토실이가 보경이의 품에 머리를 박고 비볐다. 그러더니 몸을 떨기 시작했다.


"왜 그래, 토실아. 추워?"

"무서워."

"뭐가?"

"무서운 냄새가 나."

"왜? 왜?"


폭포 소리가 토실이의 말소리를 삼키자 물방울들이 바람에 날려와 여기저기 흩뿌렸다. 갑자기 토실이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마치 보경이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듯이 발버둥을 쳤다.


"왜 그래, 토실아."

"멍멍멍. 나를 내려줘. 제발."


토실이가 애원을 했지만 보경이는 토실이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토실이까지 없으면 큰 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녹슨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놈이 어디 갔다가 오는 거야!"


거칠게 갈라지고 짜증이 섞여 있는 어린 여자의 말투였다.


"넌 누군데 우리 개를 안고 있는 거야?"

"네? 토실이는 우리 갠데요."


여자는 보경이의 팔을 강제로 벌려 토실이를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보경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뒤에서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보경이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여자에게 힘없이 끌려 들어갔다. 복도 벽에는 신발장 같은 게 중간중간 튀어나와 있어서 번번이 부딪혔다.


"엄마, 개도둑을 잡았어요."


뭔가 큰 일을 해낸 것처럼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들어와."


방문이 열리자 토실이가 여자의 품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자식이!"

"그냥 내버려 둬. 어차피 키울 것도 아니잖아."


엄마라고 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가늘고 부드러웠다.


"넌 누구니?"

"저... 보경이요."

"보경이. 그래. 여긴 어떻게 온 거지?"


겁이 나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얘, 반장아. 일단 좀 씻겨라. 애 몰골이 그게 뭐니."

"네, 엄마. 아니, 주인님."


여자는 보경이의 옷을 죄다 벗기고 샤워기를 틀었다.


"보경이라고 했지. 너 이제 내 말 잘 들어야 해."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울 수가 없었다. 샤워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이 짜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울 엄마가 대장이야. 우리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얼마나 힘든 지 알아? 그러니까 엄마 말 잘 들어. 앞으로 우리 엄마를 '주인님'이라고 불러. 그리고 나는 반장이야. 그러니까 '반장님'이라고 불러."


반장의 거친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은 목욕을 마친 보경이에게 머리핀을 돌려주었다.


"자. 이런 낡은 머리핀은 왜 하고 다니는 거야."


보경이는 머리핀을 받아 꼭 쥐었다.


"제 옷은요?"

"니옷? 그건 이제 내 거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반장이 건네 준 옷을 갈아입고 나자 계단을 올라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방으로 끌려갔다.

마룻바닥이 삐걱 소리를 내는 낡은 건물 같았다.

작은 방안에는 차가운 철로 만들어진 이층침대가 놓여있었지만 보경이 혼자 뿐이었다.

해가 졌는지 불을 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듬거리며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반장은 보경이를 끌고 주인이 있는 방으로 갔다.

주인이 한 마디 하면 반장은 서너 마디를 했다.


"얘, 너는 이 엄마가 말을 할 때는 입 좀 다물고 있어. 너 때문에 대화가 자꾸만 끊어지잖아."


주인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반장은 근질근질한 입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너 눈은 왜 그래. 안 떠져?"


보경이는 병정개미들에게 눈을 물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일과 토실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똥개에게 이름을 붙여 줬단 말이지? 하하하."


주인은 반장에게 조용하라는 손짓을 하고는 보경이의 눈을 가리켰다. 반장이 다가가 보경이의 눈을 만지작 거리자 눈이 따가웠다.


"엄마, 정말인 것 같은데요. 작은 이빨 같은 게 박혀 있는데 안 빠져요."

"얘, 얘. 그냥 내비둬라. 어쩌면 저게 더 좋을지 몰라."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걸어 나가자 반장이 보경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앞서 걷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가 이상했다. 끌듯이 두 발이 움직이는가 하면 둔탁한 나무소리가 이어 들렸다. 규칙적이었다. 지팡이를 짚는 게 분명했다.


"저... 반장님. 우리 토실이 어디 갔어요?"

"뭐? 토실이? 하하. 내가 어떻게 아냐. 어디로 숨어버렸겠지. 잡히기만 하면 몽둥이찜질을 해줄 거야."


복도 끝에 다다르자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반장이 여러 번 손뼉을 치자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모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헛기침을 하며 지팡이를 두드렸다.


"자, 이 아이의 이름은... 뭐라고 했지?"

"보경이래요. 보경이."

"아, 그래. 보경이. 앞으로 너희들과 함께 살 친구야. 그러니까 잘 돌봐주고 일도 가르쳐줘야 해. 알아들었지!"

"네~에!"


아이들이 목청을 높여 한 소리로 대답했다.

주인과 반장은 보경이를 그대로 세워놓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모였던 아이들도 '와아' 소리를 내며 달려가더니 자전거를 서로 타려고 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경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안고 얼굴을 파뭍었다.

토실이가 보고싶었다.

이전 04화 병정개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