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hairpin 7. 구별되는 메아리
신발을 벗어놓고 방문을 열었다. 발바닥에서 복도의 나뭇결이 느껴졌다.
반장이 끌고 나갔던 방향을 생각하며 벽을 더듬어 계단을 내려서서는 마당으로 향하는 철문으로 다가갔다. 철문을 밀치고 나가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병정개미들의 이빨이 물고 있는 눈꺼풀 사이로 강한 빛이 밀려들어왔다.
아이들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던 보경이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차지하기 위해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보경이는 머리핀을 빼서 손에 쥐고 이리저리 눌러보았다. 그 모습을 본 재식이가 달려왔다.
"그게 뭐야?"
"응. 엄마가 사준 머리핀이야. 이걸 만지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헤헤. 너는 좋겠다. 나는 엄마가 없어."
재식이는 보경이 옆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참 고집쟁이야.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될걸 왜 맞으면서도 안 드는 거야."
"나는 장님이 아니래도!. 대장개미가 잃어버린 길을 찾으면 다시 보일 거라고 했어."
"대장개미가 어디 있는데?"
"그건 나도 몰라. 여기서 나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때 멀리서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재식이는 마당에 떨어져 있는 돌을 집어 담벼락을 향해 던졌다. 날아간 돌이 담벼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고양이 새끼! 왜 자꾸만 오는 거야!"
보경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양이 소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담벼락이 있다면 메아리가 들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깍, 딸깍.'
머리핀이 희미하게 메아리를 만들었다. 보경이는 딱딱하게 돌아오는 메아리소리를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벽이 만져졌다. 보경이는 고개를 들어 고양이에게 속삭였다.
"고양이야. 내가 지금은 줄게 없어. 내가 집을 찾아가면 먹을걸 많이 줄게."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던 재식이가 달려왔다. 재식이가 뛰어오는 소리를 들은 고양이가 담장 너머로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 어떻게 여기까지 넘어지지 않고 온 거야? 지팡이도 안 짚었잖아."
보경이는 손에 든 머리핀을 내밀어 보여줬다.
"이거야."
"이거? 이걸로?"
"응. 머리핀을 눌러 소리를 내면 메아리가 들려. 가까운 건 메아리 소리가 빨리 들리고 멀리 있는 물건에 부딪히면 메아리가 천천히 들려. 딱딱하고 부드러운 메아리도 있어."
"헥! 말도 안 되는 소리. 줘봐, 나도 해보게."
보경이는 재식이에게 머리핀을 쥐어주고는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머리핀을 받아 쥔 재식이가 눈을 감고 머리핀을 눌렀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에이, 순 거짓말쟁이.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재식이는 머리핀을 보경이의 손에 쥐어주고는 몇 발자국 떨어져 섰다.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나를 잡아봐. 그러면 믿을게."
재식이는 보경이에게 말을 하고 나서 뒤로 물러나 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보경이를 바라보았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보경이는 제 자리에서 천천히 돌며 머리핀을 눌렀다.
담벼락에 부딪힌 메아리가 딱딱하고 빠른 소리를 냈다. 방향을 바꾸자 소리가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머리핀을 누르자 소리가 어딘가에 부딪혀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보경이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돌부리에 찔린 맨발이 아팠지만 꾹 참고 소리가 부딪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재식이를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지만 믿을 수 있는 건 머리핀 소리뿐이었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보경이는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에 부딪혔다. 살랑거리는 파란 잎사귀가 느껴졌다. 방향을 틀어 다시 머리핀을 눌렀다. 소리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던 재식이에게 부딪혀 부드러운 메아리 소리를 내다가 사라졌다. 재식이는 숨을 죽이고 보경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보경이가 손을 내밀어 얼굴을 더듬자 그제서야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어때? 이제 믿을 수 있지?"
"오호호호호. 대박. 너 정말 짱이다!"
아이들이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담벼락에 올라앉은 고양이가 유난히 울던 날이었다.
바람이 불자 얼마 남지 않은 벚꽃이 흩날려 빰에 붙는 게 느껴졌다. 습하고 흐린 날씨였다.
"아무도 없니?"
"응, 지금은 아무도 없어."
마당에는 토실이와 보경이 그리고 재식이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보경이는 머리핀을 빼면서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반장님이나 주인님이 오면 알려줘."
"알았어."
바닥에 파인 웅덩이 소리를 구별하고 나무의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메아리 소리를 듣고 고양이가 울고 있는 담벼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토실이와 재식이를 찾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 둘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토실이가 짖더니 황급히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손에 들고 있는 게 뭐야?"
반장의 목소리였다. 재식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헤, 반장님. 쟤네 엄마가 준 머리핀이래요."
"뭐? 그 낡은 머리핀? 그런데?"
"그냥 저 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데요. 하하."
"헐. 별 거지 같은 소리. 오늘은 날씨 때문에 조금 늦게 일을 시작할 거야. 꾀 피울 생각 말고 일할 준비나 해."
반장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재식이가 보경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날도 반장은 재식이에게 아이들을 인솔해 일터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건물을 빠져나와 모퉁이를 지날 때까지 지팡이를 짚고 있던 보경이가 재식이에게 지팡이를 넘겨주고는 머리핀을 빼서 들었다. 일터까지 가는 동안에도 머리핀 소리와 돌아오는 메아리 소리를 구별하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 뒤를 벙어리와 장님 흉내를 내며 재식이가 따라갔다.
보경이는 보도블록과 차도, 나무와 돌, 사람들과 동물들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 소리를 구분하려고 집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경이의 걸음걸이는 당당해졌다. 그런데 뒤를 쫓아오던 재식이가 갑자기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꽤액~"
언제 왔는지 반장이 재식이의 목을 움켜잡아 내는 소리였다.
"아니, 이 자식이 왜 보경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거야?"
보경이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