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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Dec 11. 2024

탈출

mayol@hairpin 9. 다시만난 병정개미

아이들이 마당에서 자전거를 쫓아다니는 동안에도 보경이는 방 안에 앉아있기만 했다.


"보경아, 뭐 해?"


재식이었다.


"배고프지? 자, 이거 먹어."


보경이에게 비스킷을 내밀었다.

주인과 반장에게 머리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미안했던 재식이는 머뭇거리다가 문을 닫고 내려갔다.

보경이는 밤이 늦도록 창가에 달라붙은 옅은 달빛에 얼굴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인데 반장이 보경이의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몹시 흥분한 듯한 목소리였다.


"야, 너 내 머리핀을 훔쳐... 아니지. 장님이 어떻게 훔치겠어. 그럼 도대체 내 머리핀이 어디에 간 거야!"


반장은 보경이의 침대를 들추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머리핀을 찾을 수 없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자 주인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지난밤, 우리 순영이의 머리핀이 사라졌어. 범인은 분명히 이 중에 있을 거야. 당장에라도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돈을 벌러 나가야 하니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 범인을 잡겠어. 물론 그전에 머리핀이 내 책상 위에서 발견된다면 용서해 주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 모두 밥을 굶기고 범인은 마당에 있는 나무에 묶어 놓을 줄 알아."


머리핀이 사라졌다는 얘기에 애가 타는 건 보경이도 마찬가지였다.

반장은 아이들을 인솔해 일터로 나가면서 재식이를 추궁했다.


"재식이 너. 네가 보경이랑 제일 친하지. 네 놈이 한 짓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제가 왜요."


재식이가 화를 내며 반장에게 대드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장은 하루종일 아이들이 일하는 일터를 돌아다니며 감시를 했다.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반장은 아이들 방을 다니며 머리핀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토실인가 뭔가 하는 그놈의 강아지 새끼가 물어갔을까...'


반장은 중얼거리며 주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주인과 반장은 아이들을 일터로 내보내며 연설을 했다.


"너희들이 다 나가고 나면 너희들의 방을 조사할 거야. 어디에서든 머리핀이 나오기만 하면 그 아이는 크게 벌을 받을 줄 알아."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앞장서서 가고 있는 보경이와 재식이를 따랐다. 하나 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자 재식이가 보경이의 손을 이끌어 전봇대 옆으로 데려가 세웠다.


"여기 쓰레기통에 종이봉투가 있어. 그 안에 네 옷이랑 구두 그리고 머리핀이 들어있어. 반장이 오기 전에 빨리 도망가."

"뭐? 정말이야?"

"그동안 즐거웠어. 빨리 가."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재식이는 제자리로 돌아가 벙어리 흉내를 내며 구걸을 했다. 보경이는 종이봉투에서 머리핀을 꺼내 이리저리 눌렀다. 그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구두를 신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반장이 거리로 순찰을 돌기 위해 나왔다.

아이들은 각기 제 자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고 좀 더 떨어진 곳에서는 재식이가 큰 목소리로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보경이가 서 있을 전봇대로 다가갔지만 보경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 어?"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경이가 보이지 않자 재식이를 노려보았다. 재식이 주변으로는 행인들이 많아 다가서기가 힘들었다. 반장은 집을 향해 달려갔다.

비릿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보경이가 안 보여요."


반장이 주인에게 이르는 사이에 복도를 뛰어가는 토실이의 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 놈의 개새끼를!"


주인은 반장을 앞세우고 지팡이를 짚었다.

비릿한 바람이 점점 강해지더니 빗방울에 맞은 벚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벚꽃은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토실이와 보경이의 머리에도 떨어져 내렸다.

보경이는 토실이를 끌어안고 연신 머리핀을 눌렀다.

조금씩 주변의 사물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로등 주변으로는 대여섯 사람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빵집에서는 갓 구운 빵을 진열하던 점원이 나무상자를 들어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재식이는 길 건너에 서서 보경이가 길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 너희들 보경이 못 봤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인과 반장이 나타나자 구걸을 하던 아이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봇대 옆에는 보경이가 버리고 간 지팡이만 있었고 신호등 앞에는 재식이가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왜 일 안 하고 이렇게 멍하게 서 있는 거야! 보경이 어디 갔어!"

"어버버버."

"아니, 이 자식이 대답은 않고 왜 이래."

"어버버버버버."


재식이가 벙어리 흉내를 내며 손을 벌리자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와 모자에 동전을 넣었다. 주인은 재식이가 바라보던 길 건너편을 유심히 살폈다. 길 건너에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도망가고 있는 보경이의 뒷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야, 저기다 저기."


주인은 반장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팡이에 힘을 주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보경이는 토실이를 안은채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돌부리가 나타나면 토실이가 짖어 피해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보경이도 머리핀이 만든 메아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길을 찾았다.


"토실아, 개천을 찾아야 해. 그러면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이들과 함께 지내던 건물로 가면 쉽게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과 반장에게 걸릴까 봐 겁이 났다. 토실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짖었다.


"저쪽에서 물소리가 들려. 저기 언덕으로 올라가면 될 거 같아."


보경이는 토실이가 말하는 대로 사람들 틈에 섞여 길을 건넌 후 언덕을 향해 걸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반장과 주인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보경이와 토실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좁은 언덕길에는 차도 사람도 느껴지지 않았고 빗방울 소리만 메아리를 흩트렸다.

보경이를 쫓던 주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반장의 어깨를 더 강하게 잡았다.


"헉, 헉."

"엄마, 나도 힘들어요. 그냥 혼자 걸으시면 안 돼요?"

"뭐라고?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칠칠치 못하게 애를 놓치면 어떻게!"


주인과 반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누군가 달려와 주인의 지팡이를 낚아챘다. 재식이었다.


"에구구구."


지팡이를 빼앗긴 주인은 반장의 목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니, 저 놈이!"


반장이 고함을 질렀지만 재식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비를 맞으며 히죽거렸다.


"됐거든요. 와서 뺏어 보시던가요."


지팡이를 빼앗아 든 재식이의 등에는 커다란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야야, 순영아. 저놈은 우리가 못 잡아. 엄마 일어나게 어디 나뭇가지라도 하나 주워와 봐. 저 장님 계집애라도 잡아야지."

"저 놈의 강아지새끼는 잡히는 대로 어미처럼 팔아버릴 거야!"


반장은 소리를 지르며 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고 왔다. 허리춤에나 오는 짧은 막대기를 짚은 주인은 반장의 몸에 기대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비가 그치고 해가 노을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언덕을 중간쯤 내려왔을 때는 보경이도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다.

보경이가 몸을 숙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자 품에서 뛰어내린 토실이가 몸을 털면서 으르렁 거렸다.


"왜 그래. 토실아."

"주인과 반장이 쫓아오고 있어."


주인과 반장이 쫓아온다는 소리를 듣자 몸이 떨렸다. 보경이는 다시 머리핀을 누르며 길을 찾았다.


"내 꼬리를 잡아봐. 저기서 폭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폭포?"

"응. 폭포 소리가 분명해."


보경이는 어느새 훌쩍 커진 토실이의 꼬리를 잡고 따라갔다. 하지만 폭포에 이르렀을 때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주인과 반장이 바로 뒤에 붙어서 쫓아오고 있었다.


"야, 너. 거기 안서!"


지칠 대로 지친 보경이가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본 토실이가 주인과 반장을 향해 으르렁거리더니 주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주인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머리로 밀어 넘어뜨렸다.


"에구구. 순영아, 엄마 넘어진다."


반장이 넘어진 주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우는 동안 토실이와 보경이는 돌계단을 통해 산책로로 내려갔다. 머리핀을 누르자 토실이가 엄마를 처음 만났던 돌담과 주변의 모습이 머릿속에 환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똑딱, 똑딱'


머리핀이 만든 메아리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보경이는 토실이가 짖는 소리와 메아리 소리를 따라서 쉴 새 없이 걸었다. 어느덧 집으로 가는 돌계단이 나타났다.


"다 왔어. 여기만 올라가면 집이 보일 거야. 빨리 올라가자."


토실이가 꼬리를 흔들며 계단을 올라갈 때였다.


"야,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우두머리 병정개미의 반가운 목소리였다.


"너희들을 찾아다녔어. 길은 찾은 거야?"

"그럼, 찾았지."

"그래, 그럼 약속을 지켜. 빨리."


보경이가 계단 중간에 엎드려 병정개미와 대화하는 사이에 주인과 반장이 계단 아래까지 쫓아왔다. 토실이가 으르렁 거렸지만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 내 옷과 머리핀 내놔."


반장은 병정개미들이 힘겹게 찾은 길을 발로 헤집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고 주인은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막대기만 두드렸다.

길을 잃게 된 병정개미들이 흩어지며 우왕좌왕하자 보경이와 대화를 하던 우두머리 병정개미가 더듬이를 고추 세우며 반장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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