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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Dec 04. 2024

빼앗긴 머리핀

mayol@hairpin 8. 다시 짚은 지팡이

반장은 재식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보경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손에 든 게 뭐야?"

"머리핀이요."

"지팡이는 왜 재식이에게 주고."

"그냥요."

"그냥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오늘은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알아서 해!"


반장이 보경이를 다그치는 사이 재식이가 지팡이를 보경이의 손에 살며시 쥐어주고는 몇 걸음 떨어져 섰다.

저녁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모두가 쉬는 시간에 보경이와 재식이는 주인의 방에 불려 가 있었다.


"자, 우리 재식이가 말해보자. 보경이가 이 머리핀으로 뭘 하고 있는 거지?"


부드럽지만 가늘고 단호한 주인의 질문에 재식이가 눈알을 굴렸다.


"재식아. 우리 재식이는 우리 집의 주인공이잖아. 네가 쟤랑 어울려 놀아주니까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몰라. 나는 지금 너를 야단치는 게 아니야. 보경이가 왜 머리핀만 만지고 있는지만 말해줘."


재식이는 두려움에 떨며 보경이의 머리핀에 대해 그동안 보았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주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재식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반장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뭐라고? 저 자식이 우리 엄마 앞에서 거짓말을 하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쉿! 순영아, 제발 조용히 좀 해봐. 지금 우리 재식이가 말하고 있잖아."


주인은 손짓하자 반장이 보경이의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있던 머리핀을 찾아 가져다주었다.


"자, 그러니까 지금 이 머리핀으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지?"

"네. 그렇다니깐요."


재식이를 쳐다보던 주인이 보경이에게 고개를 돌려 다시 물었다.


"지금 재식이 한 말이 다 사실이야?"


보경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큰 소리로 웃었다.


"호호호. 그래 그 말이 맞다고 치자. 그런데 말이야. 네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으면 우리가 돈을 벌 수가 없어.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너를 데리고 온 그 똥개 새끼랑 너랑은 한마디로 무용지물이지.”

"저는 장님이 아니에요. 그리고 똥개가 아니라 토실이예요."

"뭐라고? 암튼 얘는 겁이 없어. 호호호."


보경이는 주인과 반장이 번갈아 놀리는대도 꼼짝 않고 서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좋아. 내일 아침에 마당에서 네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너를 놓아주지. 하지만 네 말이 거짓이라면 너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지팡이를 짚으며 돈을 벌어와야 할 거야."


날이 밝자 반장이 방마다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밖으로 나와!"


보경이는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내려왔다.

마당에는 집에서 쫓겨났거나 불구가 된 아이들이 주인을 향해 나열해 서 있었다.

인원을 확인한 반장이 모두를 자리에 앉게 했다.

주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보경이에게 다가와 보경이의 지팡이를 뺏었다. 그리고는 보경이의 낡은 머리핀을 쥐어 주었다.


"지금 이 마당 어딘가에는 작은 화병이 하나 있어. 보경이 네 방에 있던 화병이지. 그 화병을 찾아서 내게 들고 오는 거야. 그러면 앞으로는 지팡이를 들지 않고 일을 나가게 해 주겠어. 아니다. 아예 내쫓아 버려 주지. 그게 소원이라면. 어차피 돈도 못 버는 아이는 필요 없으니까."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담벼락 위의 고양이와 구석에 숨어있던 토실이도 지켜보고 있었다.

보경이는 크게 한숨을 쉬고 머리핀을 눌렀다.


딸깍, 딸깍.


바닥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버드나무의 메아리가 들려왔다.

보경이의 머릿속 하얀 도화지에는 마치 그림을 그려 넣듯이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 둘 채워졌다.

나무를 지나 몇 걸음 걷는데 보경이만 한 키의 사람이 느껴졌다.


"반장님도 자리에 가서 앉아 주세요."


그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보경이 몰래 마당에 서 있던 반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아이들 옆으로 갔다. 주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보경이가 버드나무를 지나 머리핀 소리를 냈지만 화병의 메아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자전거에 부딪힌 소리가 복잡하게 들려왔다.

자전거 바큇살 사이로 메아리가 갈라져 흩어지다가 사라졌다. 자전거가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자전거를 향해 머리핀을 누르면 메아리가 흩어지지 않고 크고 작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메아리가 섞여 돌아왔다.

보경이는 자전거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머리핀을 눌렀다. 하지만 앞으로 더 걸어야 할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데 뭐가 그렇게 많지? 한 발자국만 더 걸어볼까.'


보경이가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와르르'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받쳐 놓은 자전거가 넘어졌다. 자전거에 실려있던 온갖 박스와 잡동사니들이 보경이를 덮쳤다.

아이들의 탄식 소리와 멀리서 토실이가 짖는 소리가 섞여 들렸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보경이가 정신을 차린곳은 방 안의 낡은 침대였다.

반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제 왜 지팡이가 필요한지 알겠지! 그리고 머리핀은 압수야. 앞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일을 나가도록 해!"


반장은 지팡이를 던져 주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보경아, 미안해. 내가 괜히 주인님에게 말을 해가지고."

"아니야, 괜찮아. 사실인데 뭐. 그런데 내 머리핀 어디 있는지 알아?"

"응. 반장님이 머리에 꽂고 있던데?"


그날도 그다음 날도 보경이는 전봇대 옆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구걸을 했다. 재식이는 여전히 벙어리 흉내를 내며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어버버버, 으으버버버버버."


재식이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지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와 모자에 돈을 던져주었다.

보경이의 모자에도 한두 푼 돈이 떨어지긴 했지만 재식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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