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대면하길 포기했다
설이 다가온다. 앞장서서 기차표를 끊었던 난, 이제는 명절에 본가로 가지 않고 나만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오늘 소 씨에게 "우리 아빠는 내가 안 가는 거 엄청 서운해하실 거야. 이럴 때라도 가족끼리 모이길 바라시는 거 같아. 아는데, 그래도 안 갈 거야."라고 했다. 매일같이 전화하면서도 명절에 만나는 건 피하고 싶다.
작년 추석부터다.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래도 명절이니까' 갔다. 초등학생 때처럼 한 집에 30명이 모여 20명이 10명에게 절하는 모습은 사라졌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중년은 노년을 맞이했다. 다수였던 우리는 소수가 되어 이제는 같은 곳에 10명이 모이는 것도 힘들어졌다.
학생 때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부모님께서는 직원을 두는 것보다 아이인 내가 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셨다. 돈이 나에게 돌아오는 게 우리에게 득이었고, 내가 어른들에게 말 거는 연습을 할 수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하루종일 일하는 고역을 체험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돈 모으는 습관을 형성하고 사람들에게 말 붙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명절이 되면 특히나 바빴다. 그때는 왜 어른들은 명절만 되면 집에 안 가고 친구들이랑 술판을 벌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온갖 욕을 입에 담는 걸 보고 기분이 나빠져 '네 새끼도 그렇게 컸으면 좋겠다' 하면서 속으로 욕했다. 술에 취해 드러누워 집에 안 간다고 하는, 돈 깎아달라고 징징거리는, 실내에서 담배를 펴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께 '형님, 사모님'이라고 호칭하며 빨간 날에도 문 열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사람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 날을 위해 명절이 아닌 검은 날부터 준비를 하고 빨간 날이 끝나는 날까지 치웠다. 이때 친척들은 우리에게 "명절이니까 쉬면 안 돼? 왜 일을 하는 거야?"라며 나무랐지만, 장사하는 우리에게는 그날이 매출을 올릴 수 있는 1년 중 얼마 안 되는 귀한 날이었기 때문에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을 있었는데도, 우리 엄마는 모든 빨간 날에 시댁에 가서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내가 본 명절은 가족이 모여 함께 웃는 날이 아니라, 엄마가 고생하는 날이었다.
엄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명절에 가는 걸 그만두었다. 엄마는 내가 주방에 들어가는 게 싫다고 했다. 다른 젊은 사람들은 놀고 있는데 나 혼자 일하는 게 짜증 난다고. 그렇다고 내가 거실에 가만히 있는 것도 불편했다. 왜 가족이 보내는 명절에 주연과 조연이 따로 있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내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성적, 결혼, 출산 등을 너무 쉽게 평가받았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반에서 몇 등 하니? 대학은 어디 갈 거니? 연애는 하니? 누구랑 만나니? 거기 집안은 괜찮니? 결혼 언제 할 거니? 애는 엄마한테 키워달라고 해."라고 했다. 매일 연락하는 내 친구들도 나에게 잘 물어보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남이 나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되묻고 싶었다. 월 수입이 얼마나 되세요? 앞으로 어떻게 노후를 대비하실 건가요? 자녀 교육은 잘하고 계세요?
이런 걸 겪은 나는, 결혼을 한다면 제사 없는, 많이 캐묻지 않는 집안을 만나고 싶은 게 꿈이 되었다. 행복의 요인을 찾아간 게 아니라 불편한 걸 피하는 안타까운 선택이다.
세상이 활발하게 돌아가게 하는 건 청년이다. 이들의 식견은 날이 갈수록 바뀌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문화는 아직도 몇십 년 전에 머물러있다. 어른들의 시각에서는 이런 게 예전의 것을 보존하는 문화일 수도 있지만, 행복한 경험을 하지 못한 청년에게는 현대와 조화가 없는 걸림돌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고집이 강해진다. 그럼에도 어른이라면, 자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흐름에 맞춰서 조언할 수 있어야 한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문화를 바꾸지 않으려 한다면, 지금 이 기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