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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렌 Mar 03. 2024

여백

채우지 않아도 된다

근래 좋아하게 된 하카루 시로소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창밖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다. 오늘은 어쩐지 글을 쓰기 싫은데, 뭘 하면 글을 쓰고 싶은 벅찬 마음이 들까 하며 찬 바람에 흔들리는 비닐하우스를 지켜본다. 봄이 다가오는 이 날씨에, 침엽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왜 굳이 뭘 하려고 하는가 의문이 든다.


잠잘 때 에너지를 제일 적게 쓴다. 그런데 이 시간에도 잠자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라고는 할 수 없다. 결국 사람이 살아있는 순간에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했다’는 시간을 내어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왜 사람은 꼭 무언가 만들어내기 위해 힘을 써야 하는가 싶다. 아무것도 안 만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것인가?


이걸 절실히 순간은 혼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움직일 때였다. 올라가는 것이 목적인데, 그 짧은 1분에도 가만히 있는 게 싫어서 핸드폰을 켜고 뭐든 보려고 애썼다. 지금은 그때가 기억나지 않는다. 집중할 거리를 찾아 나서는 하이에나 같다. 마우스 커서가 입력을 기다리듯 항시 깜빡이려 한다.


뛸 때도, 음악에도, 생명의 시간에도 리듬이 있는 것처럼 행동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 채워져 있는 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무디게 만든다. 자연을 지켜볼 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땅 위로 이어진 하늘의 여백이 있기 때문이며, 음악의 클라이맥스에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쉼이 있기 때문이다. 악보에는 일부러 쉬라고 표기해 둔 쉼표도 있지 않은가. 문장에도 쉼표가 있고, 산행을 할 때도 쉼터가 있다.


요즘에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연주자가 건반을 어떻게 눌렀을지 상상하며 쉰다. 피아노가 아닌 키보드를 탕탕 두드리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이제는 피아노를 부드럽게 누를 수 있는 능력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박자를 느끼고 상상하는 것은 할 수 있다. 음악으로 무엇을 표현하려 애썼나 상상해 보면, 음악하는 사람은 소리로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애쓰지 않아도 생각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음악의 분위기와 비슷했던 나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이렇게 밀도 있는 삶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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