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중입니다_계절의 맛

by 정림올제

밤사이 눈이 온다는 예보 때문에 그 전날 제설작업으로 뿌려놓은 염화칼슘이 온갖 도로를 하얗게 덮었다. 낯설게 보인 도로는 눈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그저 하얗게 남은 염화칼슘의 잔해들과 가루들이다. 왠지 예보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며, 염화칼슘은 제 역할을 잃은 채 흔적만 남겼고 도로는 제 색을 잃어버린 듯하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겨울이라고는 하나 예년처럼 큰 추위가 없어 겨울축제들이 난항을 겪고 있고, 스키장들이 인공눈을 뿌리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는 뉴스를 봤다. 그러다 절기 대한을 기점으로 여보란 듯이 지독한 한파가 몰려왔다.

아이들의 방학도 있고 한파에 산책하는 것을 살짝 미루기도 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리 추워도 산책을 미루지는 않았는데, 올해 겨울은 이런저런 핑계로 산책을 간간이 건너뛰었다. 귀찮음과 추위에 진 것이다.

'이럼 안 되지,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온 산책길이었다. 얼굴을 에는 듯한 바람에 얼굴이 시리고 또 시렸다. 하지만 깊게 들이마신 차가운 공기에 몸속 깊이 시원함이 느껴졌다. 답답하게 담겨 있던 마음 한 구석, 흐릿했던 생각들이 찬 공기로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평소보다 적었다. 그래도 나처럼 추위를 무릅쓰고 나온 이들이 몇몇 보였다. 모두 두툼한 패딩을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찬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며 걸으니 '잘 나왔다' 싶었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조금씩 풀리고, 흐릿했던 머릿속도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집 안에만 있으면 따뜻하고 편하지만, 동시에 답답하다. 몸도 마음도 굳어가는 느낌. 그래서 이렇게 가끔은 추위를 뚫고 나와야 한다.

그래, 이게 겨울 산책의 묘미지.
아무리 추워도 겨울은 겨울이어야 그 맛이 난다.

따뜻한 겨울은 편하긴 하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계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느낌. 염화칼슘이 제 역할을 잃은 채 도로만 하얗게 만든 것처럼, 겨울이 춥지 않으면 겨울다움을 잃어버린 것 같다.

추위가 주는 불편함도 결국 겨울의 일부다. 시린 얼굴, 움츠러드는 몸,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이 있어야 따뜻한 집의 고마움도 알고, 봄이 왔을 때의 반가움도 더 크게 느낀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얼굴은 시렸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귀찮다는 핑계로 미루지 않고 나온 게 잘한 일이었다. 아무리 추워도 산책은 계속하리라 다짐한다.

겨울은 춥고, 불편하고, 때로는 귀찮다. 하지만 그래서 겨울이다. 계절이 제 색을 잃지 않을 때, 우리도 우리 다운 리듬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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