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이 싱가폴
싱가포르에 오기 전 일기 예보에서는 여행 기간 내내 비가 온다고 했었다. 하지만 여행 중에 큰 비는 한 번도 오지 않았기에, 마지막날 일기 예보에서도 비가 온다고 뜨자 우리는 '그래도 한 번쯤은 비가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날의 싱가포르 여행 일정을 새우기로 했다.
호텔 체크 아웃은 오전 11시, 하지만 쿠알라룸푸르로 떠나는 비행기는 오후 9시 30분이었기에 거의 하루가 통으로 시간이 났다.
우리는 선택해야 했다.
케리어를 호텔에 맡기고 놀러 다니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공항으로 갈지, 아니면 그냥 공항에서 놀지...
다른 나라였다면 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싱가포르 공항은 쥬얼 쇼핑몰과 연결되어 있어 이곳에만 놀러 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은지라 우리는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냥 공항에서 놀자'로 결정했다. 혹시라도 중도에 비가 내려버리면 다시 호텔에 들려서 캐리어를 들고 공항까지 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택시를 타면 편했지만, 우리에겐 겨우 60싱만 남은 상태. 그냥 이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우리는 때론 이런 미션을 만들곤 했다.
그냥 환전하면 될 것을, 그냥 카드 쓰면 될 것을 궁상맞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근데 여행이 또 너무 여유 있고 너무 편안하면 그건 재미가 없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나의 취향이지만.
돌아가는 지상철을 기다리는데 지난 싱가포르 여행에서 공항으로 가던 길이 떠올랐다.
'와, 그때 여기서 무슨 이야기했었는지도 생각나네.'
돌이켜보니 그때는 내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떤 문제가 일어나 마지막 날 관광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는데, 그 아쉬움에 대동이에게 내가 투덜이 스머프처럼 굴었던 것이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괜찮아. 아직 여행이 남았잖아. 그러니까 기분 풀고 우리 재밌게 놀자.'
과거의 그는 이렇게 이야기해 줬었다.
순간 어제 대동이를 나무랐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래서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미안하고 하니 대동이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내가 투덜이 스머프일 때 너는 나를 위로해 줬는데, 나는 너에게 투덜거리지 말고 입을 다물라고 화를 냈구나.'
지상철을 기다리는 플랫폼 위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어 지나갔다.
"앞으로는 좀 더 자비로운 내가 되도록 할게."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은 밤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그 사이 정말 많이 발전해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많이, 긍정적으로 바뀐 곳이 바로 이 공항이 아닐까?
마치 김포 공항과 김포몰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싱가포르 공항과 쥬얼 쇼핑몰은 연결되어 있었는데, 맛집은 물론이고 쇼핑할거리 그리고 관광 명소인 쥬얼 창이 폭포가 있어 분위기가 대단히 좋았다.
실내의 폭포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중앙 허브처럼 마련되어 있는 공간 위에서는 인공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주변으로는 식물이 가득 심어져 있고 위로는 자연광이 비춰 들어와 낮에 방문해도 장관이다.
'이런 곳은 인증샷이지!'
우린 사진 한방 남기고 밥을 먹으러 갔다.
실내라도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것이 귀찮긴 했지만, 공항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지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에 편하게 길이 나 있어서 불편한 건 없었다.
이곳에서도 식사는 푸드 리퍼블릭, 푸드 코트에서 했다.
'이 음식 공화국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구나!'
60 싱가포르 달러가 남아있으니 푸트코드를 이용하면 점심뿐만이 아니라 저녁, 그리고 커피까지 마실 수 있어 선택한 것이다.
대동이는 어제 내가 사테를 먹고 싶어 했다는 것을 마음 쓰고 있었는지 사태 메뉴를 추천해 줬다. 그래서 나는 사태와 밥을 먹었고, 그는 밥과 반찬을 골라 먹는 곳에서 주문을 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많아 자리를 잡는 것이 힘들 것 같았기에 그 사이 나는 미리 테이블을 잡았고, 대동이는 내 몫까지 주문과 서빙을 해 주었는데 사태를 굽는데 시간이 걸려서 약 10분간 대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식사 시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먹어보는 사태였는데 맛이 좋았다. 어쩌면 사태 거리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바로 구워서 나왔기 때문에 아주 따듯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음식은 바로 해서 따듯할 때 먹는 것이 최고다.
나는 한 그릇을 말끔히 먹어 치웠다.
식사를 하고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자리에 앉는 카페에 가게 되었다.
커피빈이었다.
커피빈이라니..
커피빈이 싫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다른 나라에 갔는데 그 나라만의 고유 브랜드 카페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카페들은 자리가 없거나 식사를 같이 주문하는 분위기라 들어가려다 항상 포기하게 돼버리는 것이었다.
어쨌든 좋았다.
배는 부르고 커피는 향긋하고 의자는 푹신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모바일 게임을 시작했는데, 스토리도 없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무지성 게임에 우리는 가볍게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그냥 때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이런 게임을 하니 지나치게 재미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시간이 마하의 속도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 한다는 것이 한 시간을 그 게임을 하며 카페에 앉아있었던 것 같다.
엉덩이가 무거우면 더 오래 그곳에 머무르겠지만, 한 시간 이상은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우리기에 움직이기로 했다.
"비행기를 어디서 타는지 미리 알아두자."
목적이 생겼다.
싱가포르 공항에는 터미널이 4번까지 있다. 즉, 비행기를 타는 곳이 4군데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 1 터미널이나 2 터미널쯤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아니면 나중에 허겁지겁 당황스러운 사건이 벌어질 것임으로 미리 가보기로 한 것이다.
터미널은 모두 쇼핑몰과 이어져 있으며, 터미널끼리는 모노레일로 오갈 수 있어 이동이 쉽다.
4번 터미널만 조금 문제인데, 거리가 꽤나 멀어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해서 우리는 '제발 4번 터미널만 아니길'하고 바랬다.
처음으로는 1번 터미널로 향했다. 전광판을 보니 우리가 타는 비행기가 없어서 '여긴 아닌가 보다'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2번 터미널로 향했다. 전광판에 9시 30분 비행기까지 뜨지 않아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여기 아닌 것 같은데?'와 "여기일 것 같은데"로 의견이 갈렸다.
참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 '창이 공항'을 검색하면 사이트에서 몇 번 터미널에서 탈 수 있는지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밍도 신기한게 딱 3번 터미널로 향하는 모노레일을 기다리는 와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실제로 찾아보니 우리가 가야 하는 곳도 3번 터미널이었다. 뭐, 덕분에 다른 터미널도 구경해 봤으니 나름 의미 있는 방황이었다고 치자.
한 가지 꿀팁을 주자면 2번 터미널에서 3번 터미널을 오갈 때 모노레일은 쥬얼 폭포를 스쳐 지나가기에 아주 장관이다. 이 장면을 위해서라도 모노레일을 일부러라도 타보길 추천하고 싶다.
'바로 3번 터미널로 향했다면 이 경치를 보지 못했겠지...'
괜한 의미부여처럼 보일지라도, 진짜 그렇게 느껴졌다.
제3 터미널에 도착했다.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 푸르로 가는 항공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그중에서 말린도 항공을 타고 가기로 했다.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버젯 에어라는 사이트를 통해서 티켓을 구매한지라 '혹시 취소되거나 잘못 예약되어있진 않겠지?'라며 계속 불안해야 했다는 것.
이 말을 들은 누군가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네?'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건 괜한 걱정이 아니다. 외국 여행사 홈페이지를 통해서 항공권을 구입하면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심지어 당일에 자리가 없다며 취소 당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공항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기로 했다. 물론 쉬지만은 않았다. 무지성 게임에 빠져들었다.
생각 없이 게임을 하다 보니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차라리 두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길까 봐 챙겨 온 노트북이었는데...'
이곳에서 일 때문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펼쳐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이렇게 갑자기.
물론 이 글을 누가 읽어 줄지 아닐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릴 적 꾸었던 꿈인 여행작가로서의 삶을 이참에 시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 '시작'이 바로 이 글의 도입구, 첫 부분을 쓸 때였다.
https://brunch.co.kr/@kimdongjoo912/10
나는 그렇게 공항 의자에 앉아 캐리어에 노트북을 올리고 두서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술술 이야기가 나왔다. 글이 매끄럽거나 대단히 감동적이게 써지진 않았지만, 주저리주저리 생각했던 것들을 기록하고 있자니 이것 참 재밌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적어 내렸다.
잠깐 손가락이 피곤해질 때면 가만히 멈춰서 이 글이 출판되어 싸인회를 하는 하는 상상을 했다.
'오.'
그러자 한도 끝도 없이 부끄러워졌다.
6시쯤까지 글을 썼다.
이젠 돌아다니고 싶어져서 짐을 언제부터 받아주는지 카운터 직원에게 물어보자 지금도 받아준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더 일찍이부터 받아줬으리라. 그런데 물어보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느라 우린 여태 짐을 끌고 다녔어야 했던 것 같다.
물론 덕분에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홀가분하게 쇼핑몰을 돌아다니다 비행기에서 곯아떨어졌으리라.
모든 일에 진짜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긍정적인 의미 부여를 하는데 도가 텄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짐을 맡기고 우리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다시 쥬얼 쇼핑몰로 향했다. 배가 슬슬 출출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해외에서는 밥을 먹어도 돌아서자마자 배가 고파진다.
우리는 남은 돈을 탈탈 털기 위해 다시 푸드 코트를 찾았고, 거기서 이번에도 만족스럽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고도 남은 동전까지 털기 위해 세븐 일레븐에서 콜라까지 사 마셨다.
'와, 정말 알차게 썼다.'
15센트, 원화로 약 100원 정도 남았다.
뭔가 성공한 느낌이었다.
쥬얼 폭포는 저녁 시간이 되면 폭포 쇼를 한다고 한다. 특히 올해는 디즈니 100주년이라서 디즈니 음악과 애니메이션, 영화 음악과 영상이 나왔는데 운이 좋게 밥을 먹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음악과 캐릭터들이 지나갔다. 그다음으로는 어벤저스 메인 음악과 함께 캐릭터들이 나왔는데, 요즘에는 산으로 가는 마블이지만 재밌게 봤던 시리즈인 만큼 다시 처음부터 정주행을 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타국에서 한국에 돌아가면 하고 싶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막상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몰랐었는데...
'인어공주도 보고 라이언킹도 보고 아이언맨도 봐야지.'
집에 돌아가 디즈니를 보다 보면 싱가포르게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우수수 쏟아지던 폭포에 비친 캐릭터들이 두둥실 내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싱가포르에 오라고. 우리들이 그립지 않냐고.
드디어 비행기를 탔다.
이제 싱가포르 여행이 진짜 끝난 것이다.
물론 여행 자체가 끝난 건 아니지만, 이 아쉬운 기분은 어쩔 도리가 없다.
'어쩌면 내 인생 마지막 싱가포르였을지도 모르잖아..'
내 자신이 아쉬운 소리를 한다.
'그건 니가 하는 것에 달렸지.'
그러자 또 다른 내가 맞는 소리를 한다.
'그래 또 오면 되지.'
이상하다.
싱가포르는 올 때마다 '대단히 자극적인' 즐거움을 주는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떠날 때마다 지나치게 아쉽다. '이 정도면 되었다'라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좀 더 즐길걸'이라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아직 뭔가가 남았기 때문이겠지.
그건 다음에 왔을 때 찾을 수 있을 거야.'
때론 지금 당장은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분명 어떤 문제로 보이는데 그 문제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러니까 인생은 재밌는 것이겠지.
물음표 투성이인 순간들이 주는 설렘에 몸을 맡기며 나는 또 헤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