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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Jun 24. 2022

멀리 나가기, 돌아오기

수직선의 자리는 평면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습니다. 두 선의 내적 울림은 수직의 긴장에서 오는 고요한 따뜻함입니다. 여기에 차가운 두 개의 수평선이 더해진다는 건 이 자체만으로도 수직선에게는 이질적인 일입니다. 알다시피 수평과 수직은 주요 관심사도 다르며 비슷하지도 않은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만나서 평면을 만듭니다. 


평면과 마주한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느 변이 오른쪽이고 왼쪽인가, 라는 고민입니다. 평면의 입장에서 오른쪽은 우리에게 왼쪽으로 비추어집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모든 생물체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이를 감안하여 우리의 시각을 평면 위에 옮겨 놓고 우리의 방향 감각에 맞추어 평면의 양쪽 변을 규정하기로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른쪽을 더 많이 사용하기에 오른쪽의 발달은 자연스럽습니다. 오른손잡이에게 왼쪽의 발달이 더딘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오른쪽에게 자유를, 왼쪽에게 제재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평면에서는 이와 상반된 세계가 열립니다. 평면의 왼쪽은 자유롭습니다. 거침없는 유연함, 가벼움, 해방 등이 이 안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앞서 살펴본 위쪽의 성격이 여기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게 칸딘스키의 지적입니다. 그의 말은 위쪽에서 펼쳐진 유연성이 무작정 더 높이 나아가려는 성향이라면, 왼쪽의 유연성은 오히려 밀집시키는 것에 가깝다는 겁니다. 밀집은 수직선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심해지기에 위쪽과 왼쪽의 유연성에 대한 차이를 확연히 드러냅니다. 이러한 역량의 차이는 경쾌함, 해방감 등 다른 성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왼쪽의 자유는 구속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왼쪽은 위쪽의 성향과 공통된 성질을 갖고 있지만 대체로 위쪽만큼 마음껏 확장해 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왼쪽이 겪어야 하는 속성의 변화 때문인데 이는 자체 내에서 일어나므로 스스로 다스려야 하는 과제와 같은 겁니다. 


수직을 반으로 자른다고 가정하면 가운데 중심이 생깁니다. 이를 기점으로 위로 향하면 왼쪽의 고유성은 상승하고 아래로 향하면 약해지거나 사라집니다. 칸딘스키는 이에 대한 이유를 관계에서 찾습니다.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역할로서 수직선을 평가한 겁니다. 이 과정에서 모서리가 생성되는데 어쩐지 이 모서리가 왼쪽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면의 왼쪽이 위쪽과 유사한 것처럼 평면의 오른쪽은 아래쪽과 닮았습니다. 아래쪽의 속성인 빼곡한 밀도, 무거운 중량감, 구속 등은 오른쪽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왼쪽처럼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에서는 아래쪽에 비하여 활발하지 않은 것이지 자신의 역량을 왼쪽처럼 저하시키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오른쪽의 긴장은 왼쪽보다 강하기에 저항에 있어서도 왼쪽보다 세게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래에서 위로 향할수록 해방감이 커지는데 이 효과가 왼쪽보다 오른쪽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왼쪽의 울림은 위로 향할수록 강해지지만 오른쪽의 울림은 아래로 향할수록 커지고 위로 향할수록 약해집니다.  오른쪽의 수직선도 위아래에 의하여 연결되고 이로 인하여 두 개의 모서리도 생깁니다. 이 모두가 왼쪽과 같은 경우입니다. 


칸딘스키는 평면의 왼쪽과 오른쪽을 문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나 봅니다. 왼쪽이란 먼 길을 떠나는 것이고 오른쪽이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랍니다. 예술에는 공통의 뿌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관점에 미술 외에 다른 영역의 예술을 적용시키는 건 그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예술이란 장르가 달라도 서로 비슷하고 밀접하다고 칸딘스키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왼쪽이 왜 먼 길을 떠나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입니다. 칸딘스키는 왼쪽을 자유 지향적인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러기에 평면의 왼쪽은 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공간인 겁니다. 사람들은 익숙함과 습관 속에서 살기에 때때로 이를 벗어나려 합니다. 우리는 이를 자유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칸딘스키가 먼 길을 떠난다고 표현한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평면의 오른편은 밀도가 높고 움직임이 무겁습니다. 칸딘스키는 이 움직임을 피곤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가까이 다가설수록 움직임은 더 느려지고 지쳐 보입니다. 여기에 모인 형태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는 만큼 휴식에 들어갑니다. 칸딘스키가 집에 들어간다고 표현한 이유를 찾는다면 여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칸딘스키는 긴장의 방향을 이야기합니다. 평면에서 긴장의 방향이 어느 쪽에 있느냐, 는 회화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왼쪽을 향한 긴장이 모험적이라면 오른쪽을 향한 긴장은 매우 안정적인 성향을 띨 것입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문학적 표현에 빗대어 평면의 긴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위로 향한 긴장 – 하늘

왼쪽을 향한 긴장 - 먼 곳

오른쪽을 향한 긴장 – 집

아래를 향한 긴장 – 땅 


이는 분명히 칸딘스키다운 관점입니다. 그가 회화 평면을 대하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각에 동의하든 안 하든 중요한 것은 그의 의도입니다. 평면에 내재되어 있는 내적 긴장을 의식하고 분석적으로 기술되기를 칸딘스키는 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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