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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Jul 11. 2022

평면의 감정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회화의 평면은 따뜻함, 차가움, 무거움, 가벼움, 그리고 이들의 혼합과 교차 등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칸딘스키는 이를 평면의 숨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내 감정으로 끌어들이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비어 있는 평면을 대할 때가 있습니다. 이 면이 일상 속에 있을 때는 무심하게 지나치든 열심히 살피든 나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이런 평면을 만나면 당혹스럽습니다. 뭘 어쩌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밀려옵니다. 과연 칸딘스키 말처럼 평면이 살아나 숨 쉬고 있는 건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평면 위에 무어라도 그려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무얼 그렸는지 집중하게 되면서 평면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이 지점에서 칸딘스키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려진 조형 요소의 울림은 평면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겁니다. 즉 이때의 조형 요소의 울림은 홀로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평면의 울림과 합해진 것이므로 이중 울림 또는 다중 울림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칸딘스키는 두 개의 그림 예시를 보여줍니다. 


그림 A
그림 B


그림의 선은 한쪽을 향한 두 개의 굴곡, 또 다른 한쪽을 향한 세 개의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쪽의 끝자락은 굵은 데다가 갑자기 잘린 채 마감됩니다. 그래서 고집스러움을 자아내지만 아래로 갈수록 점차 가늘어지며 약해집니다. 즉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긴장을 끌어 모으며 강렬해지는 형태로 완고함이 차차 강해져 마침내 최고치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선입니다. 칸딘스키는 위의 그림처럼 선의 굴곡이 왼쪽을 향한 A와 오른쪽을 행한 B처럼 서로 다를 때 어떤 변화가 있을지 관찰합니다. 


그림 A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유연함을 드러냅니다. 이 그림에서 왼쪽은 저항하는 힘이 거의 없고 오른쪽은 건실한 공간을 형성합니다. 반면 그림 B는 고집스러운 곡선입니다. 그림의 오른쪽은 저항력을 강하게 제압하고 왼쪽에는 가벼운 공간이 나타납니다. 


‘위’와 ‘아래’의 효과를 알아보려면 위의 그림 A, B를 거꾸로 세워야 합니다. 물론 선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림 C
그림 D

그림 A, B에서 보았던 고집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힘겨운 긴장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짜임새는 없고, 무언가 생성 중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굴곡이 오른쪽을 향한 그림 C는 왼쪽을 향한 D보다 한결 힘겨워 보입니다. 칸딘스키는 이런 종류의 실험에서 첫인상이 중요하고 이를 신뢰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충고합니다. 왜냐면 감각은 금세 둔해지고, 상상은 제멋대로 날아다녀 자칫하면 기준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랍니다. 


칸딘스키는 이러한 선의 긴장을 면의 긴장으로 적용해 봅니다. 긴장은 변형된 사각 형태로 평면 위에 드리워집니다. 우리는 다음 그림에서 회화의 기초 작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추상이 아니라 구상일지라도 평면 위에 놓일 대상의 자리는 감정의 방향을 싣게 된다는 겁니다.  


부조화의 긴장을 용인하는 서정적 울림
조화로움의 긴장과 대립하는 드라마틱한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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