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의 마지막 이야기
사망자만 7,300만 명 이상,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의 아픔이 가시기도 시작된 2차 대전은 끔찍하면서도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2차 대전은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이 주축이 되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대전 초반 폴란드를 빠르게 집어삼키고 프랑스를 6주 만에 점령한 독일이, 동아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미국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린 일본이 패망하게 된 주요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다.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강력한 무한 물자, 미국의 랜드리스(lend-lease)를 지원받은 소련의 독소전쟁 승리, 끝내 무너지지 않고 바다를 지배한 영국의 저력, 무리하게 소련을 공격해 패망의 길로 달려간 히틀러의 선택, 잠자는 사자의 코털인 진주만을 건드린 일본의 선택 등 2차 대전은 매 순간마다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며 우리가 아는 결말로 달려갔다. 하지만 우리가 알면서도 잘 모르는 2차 대전의 역사가 하나 있다. 바로 앨런 튜링을 필두로 하는 영국의 암호해독팀의 활약이다.
지난 두 글에서 앨런 튜링의 업적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지난 두 글은 글 최하단 링크 참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당시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앨런 튜링의 활약과 그의 비극적 최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정보(information)이다. 적군이 언제 어디를 얼마의 규모로 침공하는지를 미리 파악만 할 수 있다면 상당히 유리한 고지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된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서 맵핵을 켜고 전장을 다 보고 하면 승률이 급격히 올라가듯이. 제1차 세계 대전 역시 2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패배로 끝이 난다. 독일은 1차 대전 종전 후 자신들의 암호체계가 영국군에게 완전히 뚫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1차 대전에서는 영국군 장성이자 훗날 2차 대전에서는 영국을 이끄는 수상의 자리에 오른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독일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기간을 의미하는 전간기 동안 히틀러의 나치 정부는 전쟁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간다. 특히나 노심초사하며 준비를 했던 것은 바로 암호체계. 독일군은 폴란드에서 상업용으로 출시된 암호 기계를 개량하여 여러 복잡한 장치를 추가한 난공불락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Enigma)를 도입하게 된다. 에니그마는 알파벳을 일정 규칙에 따라 다른 알파벳으로 바꿔 표기를 하게 되며, 입력할 때마다 규칙이 바뀌는 기계였다. 그 결과 에니그마는 암호를 풀기 위한 경우의 수가 무려 1해 5900 경이라는 어마어마한 암호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독일군은 자신만만했다. 자신들의 암호체계는 절대로 뚫리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실제로 에니그마는 난공불락 그 자체였다. 연합군은 에니그마 기계를 탈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에니그마 기계를 탈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모습은 영화 'U-571'에 잘 나타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영국은 에니그마 해독을 위한 드림팀을 소집한다. 당시 소집된 사람들은 수학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20명 이상이었으며, 이들의 책임자가 바로 앨런 튜링이었다.
기계가 만든 암호는 기계가 풀어야 한다
앨런 튜링은 기계가 만든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풀기 위해, 또 다른 기계인 튜링 봄브(Turing bombe)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봄브가 문제를 풀기에는 에니그마 해독을 위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여기서 튜링은 독일군은 기밀문서 초반에 '하일 히틀러! (히틀러 만세!)'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착안하여 경우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였으며, 결국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참고로 일본 역시 비슷하게 미국에 암호체계를 뚫리게 되는데, 일본의 기밀문서 마지막엔 항상 '덴노 헤이카 반자이 (천황 폐하 만세)'가 들어갔으며 이를 기반으로 미국 역시 일본의 암호를 해독,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튜링 봄브를 최초의 컴퓨터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히는 아날로그식이기 때문에 컴퓨터의 시초가 된 아날로그 장치로 보는 견해가 많다. 최초의 컴퓨터로 다수의 사람들이 보는 것 역시 튜링이 이끄는 암호해독팀에서 만든 콜로서스(colosus)이다. 콜로서스는 당시 독일군이 만든 에니그마의 업데이트 버전 로렌츠 암호를 풀기 위해 등장한 기기로 진공관과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최초의 기기, 즉 최초의 컴퓨터였던 것이다.
튜링 봄브와 콜로서스의 활약으로 독일군의 정보는 연합군에 속속 넘어가게 된다. 그 결과 안 그래도 미국의 참전으로 기울던 전황은 더욱 급속히 연합군에 기울게 된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같은 주요 전투에서 연합군은 콜로서스가 해독한 정보를 바탕으로 좋은 성과를 빠르게 거둘 수 있었다. 튜링을 비롯한 영국의 암호해독팀이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였더라도, 결국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들은 패배가 유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암호 해독으로 빠르게 전쟁을 종전시킬 수 있었고,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튜링의 암호 해독은 종전을 무려 2년 앞당겼으며,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독일은 자신들의 난공불락 암호체계 에니그마가 뚫렸다는 사실을 종전까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독일이 패망하던 그날까지 에니그마를 기반으로 하던 암호를 쓰던 나치의 지도부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끝나고 사형 집행 직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승길로 가던 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세계 대전 이후 더욱 창창한 미래가 있을 것만 같았던 튜링의 최후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 1952년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당시 판결 내용은 10년의 감옥 생활 혹은 화학적 거세였다. 연구를 위해 튜링은 화학적 거세를 택하지만 이를 계속하여 비관해 왔고, 결국 1954년 청산가리가 묻은 사과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
너무나도 활약할 수 있는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앨런 튜링은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세계 대전 종전을 2년 앞당기며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하고 컴퓨터와 인공지능 개념을 창시한 젊은 천재의 죽음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채 대중들에게 서서히 잊혀 갔다. (컴퓨터과학계에서는 앨런 튜링의 공을 계속 인정하고 있었지만, 대중들의 인식과는 괴리가 있었다.) 하지만 1974년 암호해독에 대한 사실이 일부 밝혀지며 앨런 튜링의 공이 대중들에게도 알려졌고, 2013년 12월 23일 앨런 튜링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별 사면령으로 정식 복권되었다. 또한 영국 우체국은 '위대한 영국인 10명'에 앨런 튜링을 포함하였으며, 50파운드 신권에 튜링 초상 사용이 확정되어 현재 사용되고 있다. 지금 은행에 가서 50파운드 신권을 받으면 우리는 튜링의 초상을 볼 수 있다.
앨런 튜링의 이름을 빼놓고 컴퓨터과학, 특히 인공지능은 이야기할 수 없다. 이후 수많은 미디어에서 앨런 튜링을 다루었으며, 특히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는 앨런 튜링을 더욱 대중들에게 알린 바 있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튜링의 업적을 기려 컴퓨터과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튜링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렇게 사후 그의 업적은 기리기리 남아 아직도 명성을 쌓아가지만 비참한 생애를 마무리하며 사과를 깨물던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움만이 남는다.
여담으로 애플의 깨문 사과 로고는 튜링이 자살하며 베어 문 사과 모양에서 나왔다는 속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로고를 만든 디자이너가 부인한 바 있으며, 누구나 집에 있지만 읽어본 사람은 많이 없는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 전기에서도 잡스가 직접 애플의 로고는 튜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답한 바 있다.
앨런 튜링의 이전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