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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Jul 15. 2022

여름특강 쟁취기

분출하는 번호표를 사수하라

[D-XX]


공고가 떴다.


XX구민센터 여름특강 안내


방학은 워킹맘의 보릿고개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두세 시 남짓까지, 게다가 점심 급식까지 주는, 학교라는 돌봄의 공백이 생기는 치명적인 기간이다. 미리미리 준비해놔야 한다.


구민센터의 방학 특강만 한 것이 없다. 애들이 스스로 걸어갈 수 있을만한 거리인 데다가 강습비도 저렴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홈페이지 화면을 빠르게 훑어 오전 강의만 솎아낸다.

어차피 오후는 평상시에 다니는 학원이 있으니, 점심 먹기 전까지만 적절히 때우면 된다.


보통 월수금 아니면 화목으로 구분되어 과목이 개설되기 때문에 비는 날이 없도록 적절히 과목을 믹스해야 한다.


전략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순간이다. 직장에서 20년간 갈고닦은 스킬이 발휘된다.


나의 계획은,


월수금 9시 : 라켓볼 (정원 18명)

    지난겨울 방학 때 들었던 과목이다. 다행히 라켓과 고글을 사놔서 추가 지출은 없다. 정원이 넉넉하니 접수에 큰 걱정은 안된다.


화목 11시 : 소그룹 수영 (정원 3명)

    수영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문제는 소그룹 수업이라 세 자리밖에 없다는 건데...


화목은 플랜 B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만일의 경우 대신 농구 수업을 듣겠다는 확약을 받아낸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결전의 날만 남았다.


[D-1]


결전을 위해 내일 오전 반차를 냈다. (부장님에게는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만 했다)


긴장되어 잠이 쉬이 오지 않는다.


열 시에 등록 시작이라고 하니 넉넉하게 두 시간 전에 가면 되겠지.

문을 안 열어 밖에서 기다려야 하면 어쩌지?

폭염이 오면? 폭우가 오면? (요새 날씨 패턴으로는 둘 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D-Day]


(07:00)

불안감에 눈이 떠졌다. 8시까지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눈곱도 안 떼고 지갑과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일단 정찰을 가 봐야겠어. 왠지 불안해. 새벽 헬스도 있기 때문에 센터 자체는 일찍 연단 말이야"


(07:10)

구민센터는 새벽부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활기가 느껴졌다. 어디서 들어본 빠른 박자의 케이팝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파파 팝팝~')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래와 같은 안내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호표 "분출"이라니...


분출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출처: 네이버 사전)




분출3 (噴出)  


[명사]
1. 액체나 기체 상태의 물질이 솟구쳐서 뿜어져 나옴. 또는 그렇게 되게 함.
2. 요구나 욕구 따위가 한꺼번에 터져 나옴. 또는 그렇게 되게 함.
[유의어] 용출1, 팽배2, 폭발1


분출1 (分出)


[명사] 나뉘어 나옴. 또는 나뉘어 나오게 함.


분출2 (奔出)


[명사] 세차게 쏟아져 나옴.




뭔가 이상하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되면 실질적인 데드라인은 10시가 아니라 9시다.

9시에 '분출'하는 번호표를 받는 것으로 승부는 결정되는 것이다.


접수처 앞은 3X4의 배치로 대기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선수 1, 선수 2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수 1은 회색의 볼캡을 쓴 아저씨로, 은행나무 침대를 지키는 황장군 같은 자태로 아예 1번 의자를 끌어 번호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선수 2는 아이보리색 티셔츠를 입은 아주머니로, 원래 배치된 2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일단 2번 선수에게 다가가 탐색해본다.

"여름 특강 기다리시는 거죠?"

"아, 네에...."

"그럼 제가 3번이네요"


2번 선수 뒷자리 의자에 착석한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어쨌든 1단계는 성공이다. 이제 원하는 과목을 다 접수할 수 있는지만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1,2번 선수의 의향에만 달려있었다.


(07:30)

다홍색 티셔츠를 입은 아주머니가 입실한다. 4번임을 내가 확인하여 준다.


(8:00)

이제 선수들은 열 명 남짓이 되었다. 새로운 선수가 입장한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바로 번호표 앞에 가서 선다.


암묵적인 규칙을 모르는 것임이 틀림없다! 아니면 뒤늦은 자신의 처지를 만회하기 위해 규칙을 전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응징해야겠다. ("뒤로 가세요. 여기 선착순으로 와서 기다리는 거예요!") 일찍 온 동지들이 나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08:50)

직원이 드디어 출근을 했다. 장내가 잠시 술렁인다.


"잠시 후 아홉 시부터 번호표를 뽑아가세요. 한 사람당 한 장 씩만 가져가세요. 열 시에 그 번호표 순서대로 과목별 신청서를 나눠드릴 겁니다."


선수들이 일시에 번호표 주위를 감싼다. 계속 번호표 기계를 얼쩡거리던 선수가 문의한다.


"번호표는 어떤 순서대로 받나요?" (몰라서 묻는 것인가?)


"그건 제가 개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세요"


그러자 나를 포함한 초창기 멤버(?)들이 지적한다.


"여기 다 일찍 와서 순서대로 기다리는 거예요"


그렇다. 이것은 구민센터 특강 예약의 국룰인 것이다.


먼저 온 사람들은 서로의 순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매끄럽게 한 줄이 된다. 다만, 입장 순서가 모호한 10위권 밖에서는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09:00)

드디어 번호표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003"번 번호표가 매끄럽게 기계에서 나왔다..

이 종이 쪼가리 하나 받으려고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린 것이냐...

그러나 이것은 평범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앞줄에 서게 할 천부의 권리인 것이다.


(9:15)

잠시 자리를 비워도 좋다는 직원의 확약을 받고 집으로 퇴각한다.

성취감 뒤에 오는 공허함이 나를 감쌌기 때문이다. (=배가 고팠다)

미역국과 쌀밥을 재빨리 흡입하고 다시 경기장으로 복귀한다.


(9:40)

승리의 성취감으로 긴장이 풀려있을 선수들에게 접근한다.


우선 2번 선수부터.


"혹시 수영 접수하시는 거예요?"

"아뇨.."

(됐다!)


이제 1번 선수만 남았다.


"혹시 수영 접수하시는 거예요?"

"네에.."

"11시인가요?"

"네에.."

"혹시.... 형제를 다 등록하시나요"

"... 네에"


수영은 한 자리만 남게 되었다. 첫째는 농구로 보내야겠다.


(10:00)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메달 수여식을 기다리는 자세로 접수 차례를 기다린다. 나는 이미 경기 결과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꽤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추신: 관공서 용어에 밝은 한 지인으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불출(拂出)'과 혼동하여 대신 '분출'을 쓴 것 같다는것.

불출의 정의가 '돈이나 물품을 내어 줌'(예: 총기 불출)이라고 하니 꽤 그럴듯하다.

이렇듯, 세상의 미스테리에는 다 답이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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