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하신 적이 있나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서 신청했던 상담에서 만난 3번째 상담 선생님이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러 번 상담을 진행해 봤지만 첫 상담에서 다이렉트하게 그런 질문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물론 상담의 룰을 설명하는 취지였지만, 나는 당황했고, 불편했던 것 같다.
“아니요!!!!”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다니, 난 그냥 번아웃이 왔을 뿐이라고. 무례해.
나는 굉장히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땐 몰랐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너무 죽고 싶었던 이유였다는 걸.
내 몸도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듯이, 제발 나 좀 봐달라는 듯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이 힘든 몸이었다.
이유는 2년 동안 미친 듯이 작업했던 드라마가 엎어졌다. 플랫폼까지 정해졌던 작품이라 타격이 컸다.
건강을 망치면서 몰두했는데, 결과가 엎어지니 그 당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나를 지켜줄 줄 알았던 멋진 갑옷이 사라지고 발가벗겨진 채 초라해진 것 같았다.
일이란 내게 그런 것이었다.
그토록 일을 해서 인정을 받고 좀 더 그럴듯한 존재가 되면 그게 아빠에 대한 복수가 되는 줄 알았다.
역시 어릴 적부터 영화를 너무 많이 봤던 게 문제다.
왜, 스티브 잡스도 그러하고, 여타의 인물들이 엄청나게 성공한 이후, 생부가 찾아왔을 때 매몰차게 돌려보냈다는 일화.
내가 그럴듯한 인물이 되어 생부가 날 찾아오게 만드는 것.
난 그걸 하고 싶었던 거 같다.
안타깝게도.
5번째 만난 상담 선생님(이하 뚜벅이샘)은 내 안에서 나를 엄청나게 채찍질하는 혐오씨와 그에게 학대당하는 '꼬마 온니'를 발견하시곤 그 두 사람을 소환해서 대화를 시켰다.
인형작업이라고 표현하시는 일종의 '인형 심리 치료' 였다.
혐오씨는 '꼬마 온니'에게 말했다.
“거봐, 난 네가 이것밖에 안 될 줄 알았어.” “이것도 못해? 왜 살아?!” “그러고도 밥이 먹어가?” “넌 그래서 이 따위야.” “죽어!" "죽어버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혐오씨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악담을 쏟아냈지만, '꼬마 온니'는 거기에 대해 전혀 방어하지 못했다.
'꼬마 온니'는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그 악담을 고스란히 내면화하는 중이었다.
만약에 혐오씨가 나의 딸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난 혐오씨를 절대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작 나를 지키고 보호하고 방어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그런 악담을 들어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그 당시 나는 내가 왜 소중한 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날 뚜벅이샘은 내게 <수레바퀴 아래서>란 책을 빌려주셨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뚜벅이샘께서 책을 빌려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 안에 나를 채찍질하는 목소리와 그 채찍질을 방어하는 목소리가 있다.
사람들이 채찍질을 하는 목소리를 만든 이유는 좀 더 잘되고 싶은 마음에서 그 자아를 만들어냈지만
채찍질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때, 그걸 내 또 다른 자아가 방어해내지 못할 때 자살을 한다는 사실을
<수레바퀴 아래서> 책에서 주인공의 내면의 흐름을 통해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다.
엄마는 아빠에 대해 거짓말로 둘러대고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학교에 가면 당장 왜 엄마 성을 따라 쓰게 되었는지부터 아빠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우리 집에서 금기어는 ‘아빠’인데 아빠가 들어간 동요는 너무 많았고,
티브이를 틀어도, 아빠가 나오지 않는 드라마는 단 한 개도 없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나의 아빠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지?'에 대한 답이었던 것 같다.
혹시라도 그걸 경우, 그게 더 감당이 안 될 거 같아, 묻기가 무서웠다.
근데 보고 싶기는 하고, 정말 복잡했던 것 같다.
하루하루 암흑 같았고, 고문 같았다.
너무 괴로워서 딱 죽고 싶었던 심정이었던 기억이 났다.
어릴 적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제목, <스무 살까지 살고 싶어요>
그래 나도 스무 살까지만 견뎌보자는 생각이었던 거 같다.
그런 마음을 남편에게 고백을 했다.
“오빠, 내가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고, 꿈도 이뤘고, 너무 행복한데! 내가 자살을 생각했었어….”
자살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생각했던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런데 언제나 의연한 내 남편은 그때도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게 말했다.
“자살? 나는 매일 생각해”
“어?”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오늘도 글 쓰다가 생각했다. 자살. 아이고, 죽으면 이거 안 써도 되겠지.”
나는 '이게 아닌데, 뭐지?' 싶었다.
“그냥 사람이 너무 힘들면 별 생각이 다 드는 거지,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남편의 그 말 때문에 나는 그 불경하고 무서운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알았다.
사람이 죽어야지!!! 억하심정으로 대단히 무겁게 죽는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채찍질하는 자아한테 잠식당할 때, 그 잠깐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맑고 총명했던 한스도 고난을 겪은 이후 누구보다 자기 자리를 열심히 지키는 줄 알았는데, 채찍질하는 목소리에 잠식 당한 그 순간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했던 거다.
남편과 점심 데이트 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찾지 못한 살아야 되는 이유..
“그런데 오빤, 왜 살아?”
“그야, 호옥시나!!! 해서. 나 죽었는데 인생이 의미 있는 걸로 밝혀지면 어떻게 해.”
웃으면서 그 무거운 주제를 넘길 수 있는 것 또한 대단한 행운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 인형 작업이란 거 해보니 몰입감이 진짜 좋던데, 혹시 그 사람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그 인형작업으로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났다.
거의 20대까지 나의 모든 순간의 주제였던 그 사람을 이렇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