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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쥬 Mar 18. 2022

젊은 그대

시애틀에서 보스턴 까지...그리고 엘리베이터에 갇히다. 



 2013년 국내 유명 어학원에서 일할 때였다. 미국에서 가장 큰 어학교 중 하나인 Kaplan에서 초빙을 한 보름간의 미국 출장이 잡혔다. 시애틀로 들어가서 밴쿠버,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뉴욕, 보스턴까지의 일정인 꽤 타이트하고도 서부에서 동부까지 거리가 꽤 되는 스케줄이었다. 캐나다 출장은 몇 번 가봤지만 미국 출장은 처음인지라 설레는 맘도 있었지만 대학과 어학교 방문 일정이 많기 때문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같이 가는 멤버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고 현지 가서 조인을 하기로 한 상태라서 대충 옷 몇 가지만 챙겨서 나섰다. 


 시애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데 그 촬영 장소였던 Space needle에 가보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내 바람이니까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고 일단 첫 일정은 워싱턴 대학 방문과 대학 관계자들과의 미팅이었다. 그런데 시차 때문에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그렇잖아도 부족한 영어실력인데 졸아가며 간간히 들리는 영어는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도 안 들릴 판에 졸다니… 아무튼 시간을 흘러 여러 담당자들의 PT가 끝나고 나서 캠퍼스 곳곳을 둘러보고 기숙사도 방문하고 시간이 약간 남자, Kaplan 담당자가 기숙사에서 Space needle이 가까우니 다 같이 가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까까지는 분명 무지 졸렸었는데 갑자기 시차가 돌아온 듯 정신이 멀쩡해졌다. 사실 전망대라는 것이 어느 나라나 올라가면 다 비슷하긴 하지만 영화 덕을 꽤 많이 본 장소인가 보다. 관광객들이 꽤나 많이 있어 보였다. 인증 숏 몇 장 찍고는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 시내로 움직였다. 거기 또한 시애틀에 온 사람들은 한 번씩은 다 들리는 곳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 한잔씩 테이크 아웃하거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했다. 


 보통 출장이건 여행이건 처음 가는 곳이면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좀 해보고들 가는데 나는 미국 오기 전까지 일에 치여 사느라 출장 준비도 겨우 해서 왔다. 그래서 지역 특색이나 유명한 음식 그리고 장소 등 뭐 하나라도 알고 온 것이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같은 팀에 같이 다니게 된 한 분이 뉴욕에서 근무하는 분이라 여기저기 안내 및 잡다한 정보들을 많이 알려주었다. 또 어학교 담당자 분도 미국 시민권자이긴 하지만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나오고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통역부터 지역 소개까지 많은 서포트를 해주었다. 

시애틀 시내에서 아들과 내가 커플로 입으려고 후드티를 살 때 사용한 신용카드가 복제가 되었나 보다. 몇 시간 있다가 카드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 카드가 시애틀과 뉴욕 쪽에서 동시에 사용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해외출장이 잦으니까 카드사에서 별도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카드는 바로 사용 정지를 했으나 IT 기술이 나쁜 방향으로 재빠르게 발전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그 찝찝했던 마음을 저녁에 디저트가 유명한 케이크집에 모여서 초코 브라운 케이크를 먹고 나서 그 달콤함으로 잠 잘 자는 시애틀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시애틀 일정을 마치고 밴쿠버로 이동했다. 나에게 밴쿠버는 세 번째 출장이다. 첫 번째 출장 때는 밴쿠버 대학 기숙사에서 일주일 머물면서 낮에 일정이 끝나면 혼자 버스를 타고 시내 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거의 10년 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미주 쪽 출장은 처음이기도 했고 젊었을 때라 그 나름대로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다음 출장 때도 비슷했던 일정이었고 이번에도 대학과 어학교의 미팅들인걸 보면 난 늘 학교와 교육에 관련한 일을 늘 해오고 있었고 지금도 대학에 있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의 길을 떠날 수 없나 보다. 


그다음 도시는 포틀랜드라는 곳이다. 좀 생소한 곳이었으나 미국인들도 은퇴하고 살고 싶어 하는 도시라고 할 만큼 안정되어 있고 평안한 곳이라 한다. 그때는 그런 것에 관심이 별로 없었으나 지금 다시 그 지역을 가본다면 아마 한 달 살아보기를 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시애틀이나 캐나다 쪽에서는 보기 드문 길거리 음식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작은 포장마차들이 낮부터 즐비했다. 낮에 업무를 보고 저녁식사를 하러 간 레스토랑에서 감자튀김의 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의 산처럼 가득히 나왔는데 나는 한 두 개 먹고 말았지만 식사의 양이 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나에겐 많았던 기억이 있다. 난 초저녁 잠이 많아서 어딜 가든 9시 반경엔 자려고 한다. 물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주변을 산책하는 것은 기본으로 하지만. 같이 간 멤버들은 저녁에 쇼핑한다고 여기저기 다니고 서로 와인 한잔씩은 하는 것 같은데 난 그런 것들이 왜 그리 졸리고 피곤한지 모르겠다. 시차가 아직 안 풀린 건지. 

일정 상 같이 온 멤버들 중 반 정도는 유타대학교에서 일정이 있어서 유타로 이동했고 나중 에샌 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 일행들도 그쪽으로 슬슬 이동했다. 미국 내에서의 국내선은 늘 또 하나의 난제였다. 까다로운 짐 검사와 세월아 네월아 하며 느리게 진행되는 절차들, 그리고 불 친절한 공항 직원들 때문에 짐은 늘 가볍게 갖고 다니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예전에 중국에서 살 때도 이런 경험들이 왕왕 있었다. 대륙 사람들의 거만함은 어찌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수많은 인종의 인구들이 들락날락하고 살고 있는데 굳이 친절하게 하지 않아도 오겠다고 하는 사람이 몰려들면 최대한 까다롭게 하거나 불친절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이나 일본의 서비스 정신이 대륙에서는 무척이나 그리워지고 특히나 우리나라의 빠른 대처능력은 어디에 내놔도 최고인 것 같다. 

또 하나 놀란 건 국내선 비행기 내의 스튜어드들이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도 꽤나 길게 늘어트린 스튜어드가 있어서 의외였다. 중국에서 몇 년 살아봤기 때문에 웬만한 건 놀라지는 않으나 의외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서 미국 출장은 인생의 덤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저가항공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때고 기내에서 유료로 사서 먹는 문화가 드물었을 때라서 기내에서 이것저것 사서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업무적인 일정이 많아서 미팅과 학교 방문 그리고 담당자들과 식사하는 스케줄이 대부분이었고 공항 가는 길에 잠시 금문교 쪽에 내려서 인증샷  몇 장 찍고 뉴욕으로 향했다. 

어떤 이들은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가 그렇게 좋았다는데 난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 어째 좀 아쉽긴 하다. 


뉴욕은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왜 그렇게 미국인들도 뉴요커가 되고 싶어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반 정도만 공식적인 업무를 봤고 나머지는 자유일정으로 내가 따로 스케줄을 짜면서 여기저기 볼 수 있었다. 업무가 끝나니 오후에 같이 온 멤버들이 브루클린에 가자고 성화였다. 난 당연히 택시나 전철, 버스 중 뭐 하나라도 타고 가는 줄 알았는데 맨해튼에서 브루클린까지 다리를 건너 걸어가는 것이다. 꽤나 긴 다리였는데 언제 도착하냐고 투덜대면서 걷느라고 주위 경치를 둘러보며 걷지를 못했다. 그때 만보 걷기를 많이 했던 상태였다면 예쁜 야경들을 내 눈에 더 많이 담을 수 있었을 텐데 후회가 든다. 어쨌거나 목적지인 브루클린에 무사히 도착했고 거기서 제일 유명한 피자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줄이 엄청 길었지만 일행들이 줄을 서주고 난 다리가 너무 아파서 가게에 들어가 보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돼서 피자를 시켜서 먹었는데 정말 소문대로 맛이 일품이었다. 여태 먹어본 피자 중 제일 맛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피자들도 괜찮았지만 그건 이탈리아의 분위기가 한몫하는 것 같고 브루클린까지는 엄청 걸어서 와서인지 뭐든 다 맛이 있었다. 브루클린에서의 야경과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은 말할 것 없이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맨해튼 거리를 산책했다. 시내 중심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베이글 등을 사서 사무실로 일찍 가는 커리어우먼들을 보니 왠지 동병상련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강남 중심에 있는 직장인 여성들이나 동경 한복판의 중심가 여성들이나 분위기는 비슷하지 않을까. 순간 아 나도 강남역 중심가에 있는 직장에서 일하다 온 사람이구나 라며 혼자 속으로 미소를 머금으면서 호텔 주변의 거리들을 한 시간 정도 거닐었다. 아침에 느끼는 맨해튼 거리와 브로드웨이 가는 밤에 보는 화려함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오전에 옛 직장 동료를 만나기로 해서 서둘러 산책을 마무리하고 외출 준비를 하러 숙소로 들어갔다. 그 옛 동료는 뉴욕대학 출신이었는데 잠시 한국에 취업하려고 들어왔다가 몇 개월 근무해보고는 역시 안 맞는구나 하고는 다시 뉴욕으로 가버린 사람이다. 소호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만났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한국에 있었을 때보다 환하게 얼굴이 밝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승진도 시켜줘서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들으니 더없이 흐뭇했다. 솔직 털털한 스타일이기도 하고 미국 생활을 오래 해서 늘 나한테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많이 얘기해주곤 했는데 너무 일찍 가버려서 그 이후로는 나도 좀 심심하던 참이었다. 우린 밀린 수다를 한동안 떨다가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 잘 보이는 배터리 파크도 가보고 유명한 시내 관광지를 같이 거닐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나서 우린 언젠가 연이 되면 만나리라 생각하고 기약 없이 헤어졌다. 아마 그 친구는 지금도 야무지게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호텔에 들어와 조금 쉬고 있는데 같은 일행들이 오후 일정에 같이 가자고 해서 본격적인 뉴욕 관광을 시작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가보고 저녁에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하는 뮤지컬 저지 보이스를 다 같이 관람했다. 리스닝이 좀만 더 잘 됐어도 재미있게 봤을 텐데. 그냥 분위기로 본 셈 치고 나와서 맨해튼의 밤거리를 다 같이 걸어서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은 마지막 뉴욕 일정이다. 오전에 잠시 미팅이 있고 오후에 보스턴으로 넘어간다. 보스턴은 내일 시민 대부분이 마라톤에 참여한다고 한다. 


다음날 오전에 업무를 보고 센트럴파크 앞에 있는 사라베스라는 유명한 브런치 식당으로 이동했다. 뉴욕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행 중 한 명이 이 레스토랑은 예약을 해야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늘 많다고 한다.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중에 한국에 분점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내 생각엔 센트럴 파크가 앞에 보여서 유명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브런치를 먹고 나서 센트럴파크를 잠시 산책하고는 호텔로 와서 짐을 꾸리는데 보스턴에 폭탄 테러가 났다는 것이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영화 같은 일인지. 미국에 있으니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처럼 상황이 너무 상상을 초월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보스턴 폭탄 사건, 그리고 엘리베이터 

 우리는 미국 Kaplan 담당자와 잠시 미팅을 가졌다. 보스턴 쪽으로 이동을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비행기표를 변경해서 한국으로 귀국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우리가 보스턴에서 일을 보려고 했던 곳은 폭탄테러장소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일단은 그쪽으로 이동을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사실 일행 인원이 꽤 많았기 때문에 비행기표를 전부 변경하고 이미 예약해 놓은 국내선과 호텔을 취소시키고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일정대로 보스턴행 비행기를 탔고 무사히 도착해서 호텔 체크인까지 마치고 짐을 풀었다. 


 뉴스로는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라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는 별다른 조치 없이 조용했다. 늦은 저녁식사이었기에 호텔 근처에 있는 베트남 식당에서 간단히 먹기로 하고 짐을 대충 들여 놓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을 같이 쓰게 된 같은 회사 직원과 미국 어학교 담당자, 그리고 미국인 2명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는데 잘 내려가다가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춰버렸다. 

몇 층인지도 모르겠고 순간 패닉 상태가 돼서 비상버튼을 누르고 상황을 얘기했는데 일단은 호텔내의 엔지니어가 퇴근 했기 때문에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911을 부르려고 하니까 그러면 호텔이 영업정지 당한다고 그것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그런다. 이 모든 교신은 미국 어학교 담당자가 했고 우린 옆에서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난 이러다가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면 어떡하나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저쪽에서 안심시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911이 오면 제일 빠를 텐데 그건 못 부르게 하지, 엔지니어는 지금 시내 폭파 사건 때문에 길이 다 통제가 돼서 오는데 시간 걸릴 것 같다고 하지, 정말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갇힌 지도 한 시간이 지났다. 휴대폰 밧데리도 자꾸 없어지고 왠지 공기도 점점 탁해지는 것 같고 어느 재난영화에서 많이 나왔던 장면 같아서 자꾸 말을 아끼게 된다. 집에 문자라도 보내놔야 하는 걸까? 아들이랑 마지막으로 통화라도 할까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다. 미국인 2명 중 한 명은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신사였다. 그 와중에 외모파악은 확실히 해두었다. 양복을 빼 입은 모양새가 약속 있어서 나가는 것 같은데 시간이 길어지니까 그제서야 서로 통성명을 하면서 이 난국을 어찌할까를 얘기하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주고 받았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직업은 변호사라고 했다. 자기가 나가면 911에 신고 못 하게 한 거 고소해서 보상 받아 주겠단다. 뭐 허세려니 하고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니까 드디어 문이 열렸다. 하지만 위에서 사람들이 끌어당기면 겨우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일단 탈출하고 나서 우리에게 죄송하다면서 거듭 굽신 대며 사과하는 호텔 관계자들한테 답답한 영어로 더듬더듬 하느니 노려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계속 째려보고 있었고 우릴 대신해서 kaplan측 어학교 담당자가 속사포로 따져댔다. 그 고소를 해주겠다던 변호사는 바쁘다며 줄행랑 쳤고 나머지 두 명은 일단 구출 된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호텔측에서는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인원들한테 방을 스위트룸으로 바꾸어 주고 숙박기간 동안 뷔페를 계속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배상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뷔페는 우리 일행들 전원이 다 이용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내가 조정해서 다시 조율했다. 대충 그 정도만 얘기를 하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호텔로 다시 돌아와보니 방을 다시 배정했다고 해서 짐을 싸 들고 새로 제공해준 방으로 갔다. 약간 입구가 길게 되어 있는 특이한 방이었다. 첫날은 너무 피곤해서 방에 대한 느낌도 없었고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 일행들이랑 보스턴의 마지막 날 저녁에 내 방에 모여서 2주간의 출장을 다같이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그때 다들 내 방이 공주 방 같았다고들 감탄을 하긴 했다. 아마도 내가 제일 무서워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하면서.


그 다음날 아침 조식뷔페를 먹으러 내려 갔더니 도시전체에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기가 막힌 뉴스를 들었다. TV에서도 나오고 있지만 어학교측 담당자가 급하게 일정관련 미팅을 하자면서 전달해 주었다. 마치 계엄령이 내려진 것처럼 탱크가 다니고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테러범을 잡기 위해 도시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계엄령으로 인해서 갑자기 호텔에서 하루 종일 있게 되는 바람에 평소 출장 때는 시간이 없어서 이용할 엄두도 못 냈던 호텔 수영장에 들어가봤다. 수영할 생각은 아예 없었고 그저 수영하는 사람들 구경하다가 올라왔다. 하루 종일 호텔 안을 왔다갔다해도 하루가 너무 길었다. 

호텔 주방 직원들은 출근을 제대로 못해서 호텔내의 식재료가 점점 부족해지자 저녁 뷔페에는 거의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몇 개 없었다.  그래서 각자 비상식량으로 싸왔던 컵라면 같은 것들을 꺼내서 같이 먹는 분위기였다. 각 룸들은 직원들이 출근을 못해서 청소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고 프론트에 있는 직원들이 청소 및 주방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정말 처음으로 겪어보는 일들이다. 나중에 한국가서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하면 내 말을 믿을까 싶었다. 그래도 폭탄으로 인해서 많은 시민들이 다치고 미국은 또다시 예전 911테러와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하는 분위기였고 국가 전체가 비상체제에 돌입해 있어서 빨리 사태가 일단락 되기를 바랬다. 

그 다음날 오전에 다행히도 테러범은 잡혔고 외출금지는 바로 풀려서 미뤄졌던 업무를 하루에 몰아서 보느라고 바쁘게 다녔다. 하버드스퀘어에 있는 어학교를 방문하고 담당자들과 미팅을 한 후 서둘러서 다른 센터까지 가서 일을 마치고 나니 그래도 하버드대학교 캠퍼스를 조금이나마 거닐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학교 안을 걸으면서 이번 출장을 잘 마치고 가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다. 마지막 출장지에서 잊지 못 할 사건과 블록버스터급 영화 한편을 찍고 가는 이벤트가 있었다는 것 또한 기억할 만한 일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2주동안의 출장은 많은 대학방문이 포함되어 있어서 너무도 뜻 깊은 출장이었던 것을 느끼며 걷다가 어느덧 존 하버드 동상 앞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 동상의 구두 앞을 만지면 하버드에 들어온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이 구두를 만지며 사진 한 장씩 찍고 있길래 아들의 대학입시가 아직 몇 년이 남긴 했지만, 나도 살짝 어루만지면서 소원을 빌었다. 와이드너 도서관도 워낙 유명한 곳이기에 그 앞에서 인증샷 한 장 찍고 주변에 하버드 대학 나온 사람이 누가 있었나 생각하며 슬슬 오늘 일정을 마무리 했다. 


그렇게 짧고 굵은 미국과 캐나다 출장을 마치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삶은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여정이었고, 미국을 대표하는 몇 곳을 가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한 것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에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를 늘 준비하고 자신을 성장 시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내 자신에게 각인시켰다.


에필로그)

나중에 한국에 오고 나서 나는 엘리베이터 트라우마가 생겨서 한동안 이용을 못하고 늘 계단을 이용했었다. 한 시간 반정도 갇혔던 두려움이 무시할 것은 못되었다. 지금도 가끔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 아무 층이나 일단 내려서 걸어가곤 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그 변호사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직업을 속인 것 같다. 배우가 아니었을까? 민원을 해결하지 못하고 도망간 점과 너무 지나치게 잘 생긴 점이 변호사와는 잘 안 맞는 것 아닌가 싶다. 

 보스턴도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가보고 싶다. 100년이 넘은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장인 펜웨이파크에 다시 가게 되면 이번엔 아들이랑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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