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날의 칼
재작년 봄에 하시모토상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가장 친했던 일본 기업 인사담당자 중 한 분 이셨는데 너무 갑작스레 떠나서 죽음은 이렇게 허망하고 주변 사람들과 아무것도 교감할 수 없이 가는 건가 싶어 나 또한 한동안 울적해 있었다. 일적으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었다. 실력이 너무 모자라서 어느 회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던 아이들도 나를 믿고 다 채용해주셨고 기업 간에 협력할 일들이 생기면 제일 우선적으로 나서서 도움을 주셨었기에 늘 언니처럼 의지했었다. 가끔 홈쇼핑에서 아이크림을 왕창 사게 되면 몇 개는 챙겨 놨다가 나고야 출장 갈 때 선물하곤 했었는데.. 지금도 가끔 그분과 찍은 사진을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들면서 예전에 같이 일했던 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한국의 겨울은 일본 사람들이 기겁을 할 정도로 뼈까지 시리게 춥다. 1월이나 2월에 한국출장을 오는 일본 기업인들은 그쪽에서 입었던 얇은 패딩을 입고 왔다가 덜덜 떨다 가는 일이 허다하다. 언젠가 눈이 많이 왔던 1월이었는데 우리 대학에 면접을 보러 하시모토상이 오셨었다. 스카프는 가을에 하는 것을 매고 바바리 수준의 얇은 코트에 스커트를 입고 오셨는데 거기다가 짐은 왜 그렇게 많은지. 내가 일본 출장 갈 때 늘 짐 때문에 골병 났었는데 역시 하시모토상도 비슷하게 짐의 종류가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가장 큰 캐리어 하나는 끌고 가는 것이 나나 하시모토상이나 비슷하다. 게다가 노트북 가방 플러스 선물 가방에 본인 핸드백까지 네 개의 짐을 끌고 들고, 눈이 와서 미끄러운 학교의 오르막길을 그 추운 복장으로 올라오셨다. 그 모습을 보니 동병상련의 감정과 함께 뭐 이리 먹고살기 힘든 건가 싶은 것이 짠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선물은 안 사 오셔도 되는데 꼭 과자랑 빵을 챙겨 오신다. 어느 날은 그렇게 짐이 많은 상태에서 지방에 갔다 오는 길에 KTX 안에서 가방 하나를 놓고 내리셨다고 했다. 너무 피곤해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내릴 때 하나를 놓친 것이다. 짐 종류가 너무 많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도 가끔 일본 출장 가서 전철 안에서 너무 피곤해서 졸다가 우산 같은 것은 잘 분실하니까. 하시모토상이 잃어버린 가방 안에 환전한 출장비가 다 들어 있었는데 액수가 꽤 되는 것이라서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다행히 CCTV가 잘 되어 있는 덕에 그다음 날에 찾을 수가 있었다고 나한테 그 얘기를 하시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시는데 듣고 있는 나는 그 모습이 왜 그리도 애처로웠던지. 좀 편하게 쉬셔야 할 연세이신데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고 짐 좀 조금 들고 다니시라고 구박 같은 조언을 드리기도 했다. 그날 저녁엔 순두부를 아주 맛있게 하는 집에 모시고 가서 맛있는 두부요리를 대접해 드렸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국경을 초월한 여성들의 수다는 시간 가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그다음 해 여름 나고야에서 하시모토상을 만났을 때는 심하게 살이 빠진 모습을 보고 건강이 안 좋아진 것 같아서 걱정이 많이 됐다. 최근에 폐에 물이 차서 한 달 정도 입원을 하셨던 걸로 아는데 그 이후로 체중이 10킬로 이상 빠져 보였다. 의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어딘가 안 좋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국 갈 때 가져가라고 과자랑 빵을 사서 들고 오시는 것이 아닌가. 이젠 안 사주셔도 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말을 안 들으신다. 그런데 그때 그 과자와 빵이 하시모토상으로 받았던 마지막 오미야게(선물)였다.
그리고나서 몇 개월 후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실려 가자마자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유족은 딸과 손자 한 명이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입국 금지만 아니었다면 나 또한 장례식에 갔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맘이 아프다. 마지막 길인 빈소도 너무 쓸쓸했겠다 생각하니 왜 그리 서글픈지. 60 평생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갈 때는 어찌 그리 순식간에 주변정리도 못하고 가게 되는 걸까. 아니면 원래 그렇게 가는 것이 순리인 걸 까? 거창하게 정 리랄 것도 없이 갈 사람은 조용히 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야말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운명의 시간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해본다면 나는 어느 정도는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머지 부분은 본인이 개척하고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형성되어 있던 주변의 환경적인 조건들이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울타리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작용할 때 가 있다. 그런데 그런 운명적인 상황들이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못해서 오매불망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먹지 말아야 함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정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고 착하게 살았던 인생의 성적표가 만점에 가까웠다 하더라도 내 삶의 여정이 다른 사람들보다 짧다면 그야말로 거기까지가 하늘이 정해줬던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가면서 만족할지는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지만....
칸트의 묘비명에 쓰여 있는 유명한 글귀가 떠오른다. “내 위의 별로 가득한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내 위에 있는 별로 가득한 거대한 하늘과 우주 아래 나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내 안의 도덕 법칙을 통해서 허무함을 이기며 자유로워지고 나만의 품격과 자유를 통해서 거대한 우주와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는 심오하고도 가슴 벅찬 의미가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것 같다.
스펜서 가문에서 영국 왕실로 시집 온 다이애나의 운명은 마치 헨리 8세와 결혼했다가 천일만에 참수형을 당한 앤 불리와 오버랩된다. 영화에서 보여줬던 암시처럼 마치 사냥을 위해 키워진 꿩이 운 좋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결국엔 차에 치어서 죽게 되는 비운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혈통을 계승하기 위해 한 때는 치열하게 사랑했던 부인을 버리거나 죽이는 왕들 그리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괴로움과 언제 쫓겨 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다가 암에 걸려 죽었던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 비참하게 죽은 앤 불리의 삶들도 그 나름대로의 여정들은 본인의 행동과 생각에 따라 바뀌어서 그렇게 마무리가 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양날의 칼을 갖고 있다. 절묘하게 다가오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칼날을 어디에 사용할지 밀고 끌고 당기는 운명의 고비를 경험하게 되고 어떻게든 그 시간을 겪을 수밖에 없던 이유이자 환경이 되었던 우리의 삶들도 돌이켜보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 어떤 이유나 사건들이 되어 내 주변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운명처럼 왔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주마등(走馬燈): 사물이 덧없이 빨리 변해 돌아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 출전 荊楚歲時記(형초세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