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빠의 일기장
추석 연휴 때 부모님 댁에 갔다가 아빠의 일기장을 읽게 되었다. 그날그날 일어났던 일을 포인트만 적어 놓으셨다. 그래도 20년 동안 거의 매일 써 오셨는데 그 성실함과 한결같음에 감동을 하면서 읽었다. 엄마는 옆에서 내가 키득키득 대니까 새삼스레 옛날 일에 화냈다 웃었다 하셨다.
하루의 일과는 비록 짧게 쓰여 있었지만 나름대로 매일매일의 제목이 있었고 그 매일의 중심에는 엄마와 무엇을 했고 어떤 메뉴로 식사를 했는지였다. 물론 자식들의 변화나 다른 친척들 혹은 산에 같이 다니시는 분과의 일상들이 적히긴 했으나 마무리는 엄마의 일상으로 마무리됐었다. 점점 엄마의 호칭이 와이프, 이 권사, 이여사님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장 많이 기록한 내용이었다. 어떤 날은 엄마와 사소한 일로 말을 안 하고 있다고 쓰여있었는데 그날의 제목은 ‘냉전’이었다. 이렇게 귀여운 제목에 또 한 번 혼자서 웃으며 꼼꼼히 한 장 한 장 읽어 나갔다.
나와 내 동생에게 유난히 힘든 시기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굴곡이 있듯이 우리 가족도 몇 번의 고비들이 있었는데 아빠는 그런 내용들은 적지 않으셨다. 마음 아팠던 것들은 속으로 삭이신 모양이다. 그때 분명히 아빠는 앓아누우실 정도로 속상해하셨는데 그런 내용들은 전혀 언급을 안 하셨다. 아마도 쓰실 힘조차 없으셨던 모양이다. 가끔 동생이 새벽에 일찍 일 때문에 나가면 부모로서 맘이 아프다는 내용이 한번 정도 있었고 그 외에는 일기장에서조차 내색을 안 하셨다. 자식에 대한 안 좋았던 것은 타인에게 절대 얘기 안 하게 되는데 내가 자식을 두고 있다 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것이 아님에도 내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약점이 될 만한 것은 써놓지 않으셨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나도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적이 참 많았다. 물론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드리려고 노력하고 나의 성공으로 부모님에게 뿌듯함을 느끼게 해 드리긴 했으나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일들로 순간순간 상처를 드렸었다. 하지만 그 일기장엔 그런 내용들은 아예 흔적조차도 없었다. 그저 ‘우리 딸이 용돈 줘서 기뻤다’ ‘우리 딸이 갈비 사줘서 너무 잘 먹었다’ ‘우리 딸이 이사하는 날 와이프가 무릎 수술하고 입원해 있어서 못 도와줘 너무 속상했다’ ‘우리 딸이 박사학위 받아서 기뻤다’ ‘우리 딸이 일본 출장 갔다 오는 날 짐이 많아서 내가 공항에 마중 나갔다’처럼 딸에 대한 소소한 행복들만 적혀 있었다.
아빠의 일기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메뉴와 제목은 갈비탕과 돈가스이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집 앞에 있는 돈가스 집에 가서 사장님 내외분과 이런저런 말동무도 하시고 내 자랑도 하실 겸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 정도는 그 집 돈가스를 드시러 가는 듯했다. 계속 기름진 음식을 드셔도 괜찮을까 걱정도 됐지만 늘 가시던 곳에서 편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좋아서 가시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내가 허리디스크로 자주 못 가는 대신에 동네 인심 좋은 분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에게 평소에 드시고 싶은 것 사드시라고 엄마 카드에 항상 용돈을 넣어놓는다. 그런데 항상 돈가스와 갈비탕 외에는 절대 그 카드를 쓰지를 않으신다. 좀 비싼 것도 사드시고 장도 보고 하시라고 해도 만 사천 원 하는 돈가스 정식과 한 달에 한번 정도 드시는 갈비탕이 가장 비싼 메뉴이다. 자식이 주는 돈은 쓰기가 아까워서 그러실 것이다. 나 또한 아들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용돈을 주거나 장학금을 받아서 전액 갖다 주면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아들 통장에 넣어둔다. 고생해서 번 그 돈을 도저히 쓸 수가 없었는데 부모님도 그런 맘이시겠지.
아빠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사우나를 가셨다. 요즘은 못 가고 계시지만 옛날부터 사우나는 가장 좋아하는 하루 일상 중 하나였다.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고 특별히 소일거리가 없는 노년에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나도 가끔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소박한 하루에서 사우나 일정은 아빠에게 많은 위로가 된 듯하다. 젊은 시절에 한가닥 했던 사람들도 은퇴 후에 사회생활을 안 하게 되면 왜 다들 라이프사이클이 비슷하게 닮아갈까. 경제활동을 할 때와 안 할 때의 차이는 사람을 너무 금세 늙게 만들어 버린다. 외로움과 고립이 주는 사회적 박탈감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노인들에게 무료한 하루의 시간을 죽이는 사람처럼 변하게 한다. 그나마 사우나와 산을 다니시는 아빠는 비교적 알찬 노년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아빠는 엄마와 갈비탕을 드시러 드라이브하면서 근처의 갈비탕집을 갈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하신다. 유난히 소식하시고 입이 짧은 엄마가 한 그릇 다 비우는 것이 갈비탕이라서 그날은 엄마와의 만족한 외식 에피소드로 아빠의 일기장은 풍요롭다. 또한 집 앞의 돈가스를 드시면서 딸을 위해 이것저것 덤으로 챙겨 올 수 있어 두배로 즐겁다고 하시니 그 어느 비싼 레스토랑에서 드시는 것보다 삶의 행복지수는 몇 배가 높은 것이 아닌지. 지금은 운전을 못하시게 돼서 많이 답답해하시는 것 같아 많이 안쓰럽다.
자식이 철이 들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될 때면 부모는 떠날 때가 된다는데 그 말이 요즘엔 자꾸 와닿는다. 젊었을 때는 공부하고 일하느라 그리고 내 자식을 키우느라 부모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는데 내 자식이 크고 이제 한숨 돌릴 때가 돼가니 내 부모님은 너무 연로하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때가 되었다. 참 서글픈 삶의 여정이다. 그렇게 해바라기처럼 짝사랑만 하다가 눈을 감을 때까지도 자식 걱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부모의 운명이지 않을까.
최근에 아버지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예전과는 다르게 내용이 많이 간소해졌다. 수많은 희로애락과 인생의 흐름이 그 안에서 느껴졌었는데 이젠 아버지의 체력과 기억력도 옛날 같지 않으신 듯하다.
유난히 맛있었던 음식의 메뉴가 있었던 날엔 금액과 장소까지 깨알같이 어필해 놓으셨었는데 이젠 음식의 종류는 가끔씩만 적혀있고 외출한 날만 기재를 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하시던 산책도 자주 못 나가시니 일기에 쓸 소재가 만만치 않으신 것 같기도 하고 노년이 깊어지면서 우울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중년시절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던 격동기가 없어지니 왠지 일기장도 많이 허전해진 것 같다.
그런데 유난히 긴 구절의 내용이 눈의 띄는 것이 그날은 기분이 매우 좋으셨나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날은 내가 아버지께 새 운동화와 등산조끼를 사드린 날이었구나. 늘 다니시던 등산도 이젠 못 가시지만 그래도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가 너무 편하다며 등산복 코너에서 조끼를 사고 싶어 하셨다. 매일 만보 걷기를 하시다 보니 운동화가 많이 닳아 있길래 그날은 기분 좋게 장만을 해드렸다. 그랬더니 그날의 일기장은 딸내미가 사준 운동화와 조끼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렇게 왁자지껄한 아빠의 일기장의 너무도 그립고 그 시절의 아빠가 보고 싶다. 점점 조용해져 가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서 왠지 눈물이 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