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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쥬 Mar 20. 2022

피아노에 대한 애상 (哀想)

Moderato (보통 빠르게)처럼 

 이사 갈 때마다 늘 끌고 다니던 피아노를 이번 기회에 정리했다. 중고시장에 저렴하게 내놨더니 서로 가져가겠다고 연락이 와서 손쉽게 팔 수가 있었다. 집에 모셔놓고 치지도 않으면서 명색에 나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쳐다만 봐도 기분 좋았던 존재였는데 너무 쉽게 놓아준 건가 싶어서 일주일 정도는 피아노가 그리웠다.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로 유명했던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의 페르디난도는 젊은 악기장인인 크리스토 포리를 집으로 데려와 자신만의 악기를 만들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했고 바로크 시대의 피아노였던 하프시코드만 갖고 있었던 메디치가는 인류 음악 예술의 가장 큰 획을 긋게 되는 피아노를 만드는 역사적 배경을 만들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고 가능성 있는 아티스트들을 밀어줬던 그래서 미켈란젤로와 피아노를 있게 한 메디치 가문에 진심어른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런 열정과 관심이 있었기에 그냥 동네 구석에서 이름 모를 악기사 혹은 채석장 돌들을 가지고 노는 청소년에 지나칠뻔했던 숨은 고수들을 찾아내지 않았는가. 물론 부의 과시용으로 각종 미술작품과 동상들 그리고 악기들을 소유하고 자랑했겠지만 그런 문화는 지금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나 싶다. 피아노의 탄생은 정말 우연에 의해서 발견한 영재 장인 손길로 세상에 ‘짠’ 하고 나타났지만 어느 천재 피아니스트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사실 지금의 피아노로까지 성장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이든 조력자의 힘은 주연의 힘보다도 더 길고 꾸준하게 이어져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우리가 사랑하고 또 애잔해하는 모차르트는 한동안 찬밥신세였던 피아노를 전 세계 무대에 데뷔시켰고 관심받기를 좋아했던 모차르트에게는 딱이었던 파트너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 우리 집은 그렇게 여유 있는 집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서울의 변두리에 사는 소박한 동네의 내성적인 어린이였는데 엄마는 유독 피아노를 나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 엄마가 어릴 적 황해도에서 꽤 이름 있는 부잣집 첫째 딸로 태어나서 남부럽지 않게 자라고 피아노까지 배웠었는데 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르면서 애지중지 아끼던 피아노를 놓고 남한으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솔직히 피아노만 놓고 오셨을까마는...  그 시절에 피아노를 가르칠 정도면 가끔 드라마에서나 봤던 개화기 시절의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녀 같은 그런 이미지였을까. 많이 설레었을 엄마의 유년시절이 슬프게 맘속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늘 어느 나라든 시대를 잘 못 타고나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많고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인 지금도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보면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이 나약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하지 말자고 또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외할아버지는 그 시절 와세다 대학에 유학을 가실 정도로 집안은 넉넉했고 일찍 시집오신 외할머니는 4남매를 키우시면서 유복한 시댁에서 행복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지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집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의 인생은 거기에서 일단 멈췄고 전쟁은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하신다고 집 떠나 소식을 알 길 없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할머니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돌보고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돈을 벌러 나가야 했으니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엄마의 꿈은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것이고 당장 전쟁통에 앞일을 알 수 없는 피난민이 돼버린 현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엄마가 어릴 적 꿈꾸었던 미래는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일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미래에 대한 로드맵을 그려주며 취업을 시켜주는 사람인데도 부모님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송구스럽기만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엄마의 못 이뤘던 꿈들을 나를 통해 어느 정도 이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가 피아노였는지도 모르고.... 전공까지 시키는 것은 생각 안 하신 것 같고 교회에서 반주를 시키고 싶으셨나 보다. 물론 그 꿈을 나는 바로 이뤄드렸고 나 또한 피아노 치는 것이 너무 재밌어서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배웠고 금세 교회의 어린이 예배 반주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나에게 일반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것 외에 개인교습을 별도로 시키셨다. 그리고 동네에 피아노를 아주 잘 친다는 사람이 있으면 집으로 초대해서 내 실력을 꼭 봐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그 개인교습을 해줬던 집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정식으로 등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알음알음해서 아는 사람만 한 명씩 지도해 줬던 곳이었는데 지금식으로 말한다면 소위 스파르타식의 교육법이라고나 할까. 항상 손 등 위에 볼펜을 올려놓고 치게 했고 볼펜이 떨어지면 그 볼펜으로 손등을 아프게 때렸다. 악보에 집중하면서 손등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진땀이 늘 났었다.

 

  비운의 천재 화가인 고흐의 옆에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의지하게 만들어줬던 동생 테오가 있었고 무덤도 나란히 옆에 묻힐 만큼 각별했던 그 형제들의 애틋한 우애는 살아생전 빛을 보지 못했던 고흐에게 몇 번이나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줬던 존재였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조용히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 C장조 ‘그레이트’ D944는 슈만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슈베르트를 좋아했고 존경했던 슈만이라는 순수한 지인의 노력이 없었다면 수많은 슈베르트의 명곡들이 빛을 보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모차르트가 살아생전에 600여 곡을 작곡하고 갈 정도로 어릴 적부터 천재 신동이었던 영재 중의 영재는 음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11년 동안 유럽투어를 하면서 그의 재능을 알리고 교육했던 데는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해서 파리 이탈리아 영국 등 그 시절 그렇게 유럽 전역을 다니기 힘든 여건이었을 텐데도 교육에 대한 일념으로 많은 음악가들을 만나게 하고 재능을 선보이며 아들의 영재교육을 위해 본인의 삶을 전부 올인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대대로 내려오는 절대 관념이 된 것인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우리 인류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모차르트의 아버지나 고흐의 동생 그리고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붙어서 모든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찬란한 작품들을 만들게 한 공로자임은 틀림없다. 성공했든 안 했든..


  지금은 집안에 늘 자리 잡고 있던 피아노는 없지만 30년 넘게 교회와 다른 예배 장소에서 피아노를 쳤던 기억이 그리고 아련한 애정이 머릿속과 내 손가락 끝에 남아있다. 중국에서 몇 년간 유학할 때도 조그맣게 시작한 예배 반주를 쳤었고 기독교 재단의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학교 채플시간에 피아노를 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시간에는 내가 늘 피아노를 맡아서 수업시간 보조를 했던 기억이 난다. 풍금부터 오르간까지 다양하게 소중한 경험을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래도 그렇게나마 나에게 음악의 선율 안에서 부족한 실력으로라도 참여할 수 있게 된 데는 바로크 시대부터 낭만시대에 이르기까지 음악가들 옆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밤새워 돌봤던 매니저들과 같은 우리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란 걸 난 고맙게 생각한다. 


 내 삶의 템포는 Vivace도 아니고 Largo도 아닌 Moderato와 같은 삶이 되게 한 뒤에는, 한 때는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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