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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쥬 Mar 18. 2022

덕후가 되다

아날로그의 시대를 그리며

   

 작년에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을 집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달래곤 했다. 집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타입은 아니지만 환경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또 그것에 기가 막히게 적응하는 것이 인간임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일본 출장을 못 가게 되고 예전처럼 일본어로 얘기할 기회가 많이 없다 보니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외에는 일본어 쓸 일이 거의 없는 요즘이다. 그래서 일본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비즈니스를 20년 가까이하고 있어도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은 거의 보지 않고 지내왔다. 사실 볼 여유도 없었지만 우리 쪽 정서와는 살짝 동떨어진 그 어딘가가 계속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학습지 원차 보게 된 드라마들과 영화들은 마치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듯 쉽게 녹아들었다. 거의 비슷하게 공감하게 되는 감정선이 언제 이렇게 친근해진 걸까. 아니면 내 나이와 연륜이 포용력이라는 삶의 훈장을 달고 나서 넓어진 것일까. 어릴 적 읽었던 명작들을 어른이 돼서 읽었을 때 받는 감동의 깊이가 다르듯 무엇이든 시기가 중요한가 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말이 없고 늘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들이 몇 명 없었다. 그러다가 친구가 생기면 항상 편지를 쓰곤 했다. 그 시절엔 친구들끼리 늘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뭔가 쑥스러운듯하면서 주기도 하고 친구 몰래 책 속에 넣어두고는 눈짓으로 편지 보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예쁜 편지지를 사는 것이 비록 소소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행복했었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아니어도 그 상대가 누가 됐든 상관없이 편지 안에 마음을 전부 쏟아 놓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분히 히키코모리(집에서 꼼짝 않고 있는 사람)의 성향이 있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가 않아서 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유치원도 다녀보질 못해서 선행학습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완벽한 사교육을 받은 애들한테 성적으로 밀린 적이 거의 없었고 늘 반에서 1등을 하긴 했다. 그래서 학교 가서 배우는 매일매일이 즐거웠지만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는 일은 그렇게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나에게 유일한 대화의 창구는 펜팔이라는 매개체였다. ‘새 소년’이라는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그 잡지 안쪽에 펜팔 친구를 원하면 본인의 증명사진과 학교, 학년, 이름, 주소 등을 적어서 잡지사에 보내라고 적혀 있었다. 잡지사는 전국에서 도착한 자기 어필 프로필중에서 추첨을 하여 잡지 뒤쪽에 실어주었다. 나름대로 경쟁률이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운 좋게 나도 선택이 되었고 내 얼굴과 개인정보가 잡지 뒤편에 또 다른 운 좋은 아이들과 같이 실렸다. 그렇게 개인정보를 내보내도 지금처럼 불안한 세상은 아니었고 그런 것을 걱정할 사회분위기가 아니었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비록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지만 나는 그렇게 글의 세계에서는 도전적이었고 적극적이었다. 잡지를 보고 있는 또래의 구독자들에게 나와 취미가 같다면 같이 소통하자고 하는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닌가. 그리고 편지 쓰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펜팔이라는 종목에 도전조차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잡지에 실린 사진은 지금처럼 포토샵으로 꾸민 사진도 아니고 그저 코흘리개를 겨우 면한 순진무구한 흑백사진 한 장과 취미가 적힌 개인정보인데도 편지가 몇 통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 카톡이 도착한 것이다. 어떤 내용으로 주고받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무척이나 설레고 두근거렸을 것이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의 전달은 예나 지금이나 어떻게든 전달이 되니 말이다. 지금은 너무도 빨라져서 상대방의 결정도 스피드 있게 듣고 싶고 마음의 전달도 몇 초안에 표현해줘야 서로 간에 오해를 안 하는 세상이 되었으나 그때는 통상 한 달 정도는 걸려야 내가 보낸 것에 대한 답변이 오곤 했다. 그 답이 올 때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 시간이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상대를 기다려줄 줄 아는 여유를 누구나 갖고 있었고 느림의 미학을 즐길 줄 아는 시절이었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집에 어떤 군인 한 명이 찾아왔다. 내 이름을 대면서 만나고 싶다 하는 것이다. 군인 아저씨를 만날 기회가 전혀 없던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약간은 겁이 났었고 다행히도 엄마가 집에 계셨고 자초지종을 그 군인에게 물어보니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보내는 위문편지를 받고 내 편지에 감동을 받아서 꼭 만나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소를 보고 휴가 때 찾아온 것이다. 순수한 맘으로 온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는 기겁을 하셨고 그 군인을 잘 타일러 보냈던 일이 있다. 지금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말을 잘 귀담아듣고 순순히 돌아간 군인도 참 순수하고, 그런 편지로 서로가 위안을 삼을 수 있다는 시절이 이제는 다시 경험할 수도 없고 돌아올 수도 없는 아련한 옛 추억을 담은 한 편의 흑백영화 같다. 편지란 대화와 통신의 가장 중요했던 역할을 했었고 말로서 표현하지 못하는 세심한 것들을 전부 담아낼 줄 아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대학교 때 남자 친구가 군입대를 했을 때도 나는 매일 편지를 썼다. 그것도 매일 다른 편지지와 그 안에 그림과 사진 등 받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도록. 교회 오빠를 짝사랑했을 때도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선생님한테도 항상 편지를 동반했다. 가만히 옛날 일들을 회상해 보면 나는 글 쓰는 일에 예전부터 덕후였던 모양이다.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고 책이나 만화를 보면 그 안의 주인공이 되는 걸 늘 상상하면서 행복해했던 수줍음 많은 초등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방학 때 영화관에서 본 영화 한 편의 여운으로 한 두 달은 영화의 후편을 상상하는 네버엔딩 스토리를 혼자 만들어 보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생활과 함께 대상이 바뀌긴 했으나 나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정을 많이 주는 덕후가 되었다. 늘 혼자서 살다 보니 외로움에서 나온 행동인지는 모르겠으나 남들보다 감수성이 많아서 아직은 소녀 같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친구들이 해주곤 한다. 

 다소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만 조금은 천천히 하고 싶다. 그리고 기다리고 싶다. 바로 알 수 있는 그리고 대답도 빠른 QR(Quick Response)의 시대지만 그만큼 상처와 결과도 바로 와서 가끔은 마음의 준비가 미처 되기도 전에 모든 것이 결론 나 있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그 책임감에는 천천히 기다릴 줄 알았던 아날로그의 뒷심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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