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면서 채워지는 것
애착을 가지고 소유하다 보면 어느새 정이 들어서 못 버리고 쌓아놓은 옷들과 책들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인형들과 잡동사니들을 이제는 내 기억과 마음속에 저장하고 하나둘씩 정리를 해나가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사회생활을 25년 동안 하면서 가장 많이 산 것은 역시 옷이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그에 걸맞은 옷들이 필요했고 또 한참 멋을 부릴 나이였기에 옷 사는 것에 지출도 꽤나 많이 했었다. 다행히 몸매는 큰 변화 없이 40대까지 유지가 된 덕에 예전 옷들을 계속해서 입을 수가 있었는데 50대가 되고 나니 안 맞아서 버려야 할 옷들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그리고 편하게 입어 버릇한 것만 자꾸 손이 가서 몇 년 동안 미련 때문에 옷장 속에 방치해 놓은 것들도 이젠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닌지 싶다.
그리고 이젠 옷 사는 것에 아예 흥미가 없어졌다. 학교에 있어서 더더욱 그런지 모르겠으나 전반적으로 구매욕들이 사라졌고 있는 것들이라도 실컷 다 입어봐야 할 텐데 하는 의무감이 앞서 있다. 2-3년 전부터 주변에서 나와 함께 일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선생님이나 여직원들에게 옷들을 나눠주고 있다. 가방이나 핸드백, 화장품, 이젠 허리 디스크 때문에 신지 못하는 하이힐까지도 다 정리해서 나눠주고 있다. 그런데 나눠줄 때 왜 이리 행복한지. 거기다가 받는 사람이 기뻐하면 더없이 기분이 좋다. 아까워서 주지 못했던 미련을 좀 더 일찍 버렸더라면 이 행복감을 더 빨리 맛보았을 텐데.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정리하기 시작한 것에 감사하고 있다. 비울수록 채워지는 따뜻함을 다른 누군가도 꼭 알았으면 좋겠다.
2004년부터 일본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머무르는 호텔이 같은 경우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늘 지나다니는 상점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기모노 인형이 눈에 띄어서 한 개씩 사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렇게 한두 개씩 사 온 것이 이젠 장식장을 세 개나 사서 넣을 정도로 여러 종류의 기모노 인형이 나의 거실을 채우고 있다. 사서 들고 오는 것도 일일이 포장해서 손으로 들고 와야 했고 얼굴이 상할 까 봐서 이사할 때는 별도로 내 차에 실어 놨다가 다시 풀러 놓고는 했는데 그렇게 지극정성 들여서 모았던 인형들이 이젠 완전히 짐이 되어 버렸다. 장식장만 봐도 기분이 좋고 흐뭇했었는데 내년 봄에 이사 갈 때를 생각하니 저 인형들을 언제 다 포장해서 옮기나 싶은 것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15년 정도 나에게 독특한 취미를 주고 기쁘게 해 줬으니 그것으로 공로를 인정해주고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겠지?
다른 가정집에 많이 가본 적이 없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보통 내 나이 또래에는 그릇이나 장식품 등 뭐 하나쯤은 장식장에 모으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이해해주면서 아직까지도 그 인형들에 대해서는 결론을 못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인형들과 맞먹는 부분이 바로 책들이다. 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읽기도 많이 읽고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증정되어 들어오는 책들도 만만치 않다. 거기다가 책을 쓰기까지 하다 보니 내 책들도 한쪽 귀퉁이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학교 연구실에 어느 정도 갖다 놨기에 집에 이 정도밖에 없는 것이지 책들의 정리는 정말이지 아직 계획조차도 못 세웠다.
요즘엔 주로 중고서적을 사서 보고 있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방법도 취하고 있다. 비용과 공간에 대한 투자를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식탁이나 침대 옆 그리고 책상 주변에 책들이 쌓여있다. 분명 눈으로 보고 즐기는 용도의 책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그걸 못 비워내고 있다. 솔직히 명색이 작가를 꿈꾸고 있는데 책 욕심은 좀 내도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서 이 부분도 좀 미루고 있다. 집안에 계속 쌓일 것 같다 싶으면 일단 연구실로 피신을 보내려고 한다. 가끔 은퇴를 앞둔 스승님들을 뵈면 연구실에 있는 책들은 단 한 권도 집에 안 갖고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미 연구실에 있는 책들의 대부분을 정리하시면서 어차피 1년 동안 한 번도 보지 않은 책들은 앞으로도 계속 볼 일이 없다 하시며 과감히 정리하고 계셨다. 인간관계도 그런 걸까? 한 번도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가득인데 그런 네트워크는 정리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지. 친척이지만 연락 안 하고 안 만나는 사람들도 수두룩이고 친구인지 동창인지 명목조차 어울리지 않는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칭할 존재들도 부지기수다. 실제로 자주 찾고 전화라도 하고 소식이라도 전하는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것이다. 휴대폰을 바꿔야 뭔가 정리를 하게 되었었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연락처 리스트 중 삭제할 것들 은 과감히 지워야겠다.
나는 노후에 일을 안 하게 되면 이것만큼은 꼭 해야겠다고 정해 놓은 것들이 있다. 그중에 책을 쓰는 것 은 꾸준히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열 권의 책을 죽기 전에 꼭 쓰겠다고 목표를 정해 놓았는데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으나 평소에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학습하고 배워가고 있다. 이 책이 완성되면 일곱 권이 되니까 어찌어찌하다 보면 가능해질 수도 있겠다 싶다. 시간 날 때마다 무레 요꼬 작가의 책들을 주로 읽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영감들을 많이 받고 있다. 특히 ‘카모메 식당’ 이란 책을 읽고 영화까지 보고 나니 이 작가를 닮고 싶다 라는 막연한 동경심과 함께 나도 에세이를 쓸 수 있겠구나 라는 용기가 생겼다. 언젠가는 내 책도 영화가 된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잠시 잠깐 해본 적이 있지만 그 또한 행복하고 소박한 나만의 꿈이었고 그런 시간들이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일상이 계속될 때는 마치 웜홀처럼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글을 쓸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 까. 그 순간만큼은 어제까지 걱정거리로 가득 찼던 머리를 비워낼 수 있고 잠시 멍해질 수 있어서 그래서 내가 글 쓰는 일을 자꾸 하게 되나 보다. 하지만 내 책 또한 어느 누군가에게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나 용기를 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까 키보드를 두들기는 순간에 책임감이 더해진다. 글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면서 속은 더없이 포근해서 자신을 행복하게도 해주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되게도 해주는 묘한 매력을 가진 마법과도 같다.
비워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이는 물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맘속에 웅크리고 있어서 잘 꺼내지지 않았던 묵은 감정들과 슬픔들도 꺼내서 털어 버려야겠다. 올 한 해도 얼마나 많이 속상하고 힘든 일들이 많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지금은 잠시 잊고 있지만 내 가슴 깊숙이 나를 누르고 있었던 화병들이 하나둘씩 들춰진다. 그 아팠던 감정들이 자리를 비켜줘야 가벼워지고 홀가분해질 텐데.. 그리고 시나브로 사랑하는 마음들로 채워지겠지?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잘 잊어버린다는 점. 중요한 것들도 까먹어서 답답한 적도 많지만 옛날 같으면 부르르 떨었을 일들도 금세 잊혀 간다. 하루에 몇 가지씩 적어놓고 다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이젠 웬만하면 한 가지 정도만 하려고 한다. 목표가 많을수록 못 이룬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쌓이고 나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게 돼서 이젠 나 스스로를 자제하고 싶다. 그런데, 사실 예전만큼 체력도 따라주질 않는다. 느리게 사는 연습을 하고 매일 사소하게 생기는 기쁨에서 희망을 찾다 보면 갱년기도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