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잠복근무이지 겨울에 차 시동도 끄고 안에 있으려고 하니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뭐라고 표현을 해야 될지..
차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있어 차 안에는 금방 시야를 가리는 성애가 끼었다. 손으로 유리창을 닦아도 조금 있으면 또 끼었는데 넓게 닦아내면 밖에서 우리를 볼 수 있어 밖을 볼 수 있을 정도만 닦아냈다.
그래도 부산은 남쪽이라 생각만큼 춥지는 안 했다.
21:00 경이되어 저녁때가 훌쩍 지나 배는 고파 오기 시작하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반장님! 밥 좀 먹고 다방에 가서 몸이라도 좀 녹이고 오입시더..” “이 사람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먼.., 여기까지 와서 밥 먹으러 간 사이에 나타나면 어떻게 할래?”해서 참 난감했다.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더니 “ 저 앞 가게에 가서 빵 하고 우유나 사와”라며 돈을 주어서 따뜻한 호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돌아가며 보초를 서서 겨울철 기나긴 밤을 꼬빡 지새웠다.
우리는 설 전날이니 다른 곳에 있더라도 꼭 오리라고 믿고 잠복에 들어갔는데 안 들어온 것이었다.
행인들이 많아지는 아침까지 있었는데 소식이 없었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가 없어서 집안으로 들어 가보자고 해서 집안으로 들어가 수색을 하였으나 아가씨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용팔이 처로 보이는 뚱뚱한 여자는 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들어가서 형사라고 하는데도 많이 겪어 봤는지 시큰둥하게 대하며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잠시 안을 살펴본다며 양해를 구하고 이방, 저 방을 둘러보아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들어오지 않아 우리말을 안 듣겠지만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대구 서부경찰서에서 왔다고 하며 자수할 것을 권유하고 대구로 철수했다.
오면서 분하기도 했고, 명절날 이게 무슨 짓인지 한심하기도 했다.
대구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되었는데 명절이라 그런지 문을 열어 놓은 식당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반장 형님 집에 가서 떡국을 아침 겸 점심 식사로 먹었다.
용팔이 검거에 실패 후 어디 갈 곳도 없고 해서 반장에게 이대로 있는 것보다 영주에 투약자로 파악해 두었던 전 00을 검거하러 가자고 했다.
영주는 처가가 있어서 생소하지는 않았다.
20:30경 주소지로 찾아가니 처가 동네가 아니던가?
처갓집은 알고 있었지만 주소는 모르고 있었다.
전 00집은 처갓 집과 약 50여 미터 떨어진 2층 주택이었다.
오늘은 설날이니 집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가서 검거를 하여 수갑을 채워서 승용차에 태운 뒤 설날 처갓집에 들어가 인사도 못하고 24:00경 대구 사무실에 도착을 했다.
전 00을 유치장에 입감을 하고 01:00가 지나 집에 오니 처는 설 전날 벌써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서울 형님 집에 차례를 지내러 가고 없었다.
자려고 이부자리를 펴는데 영주에 있는 손위 큰 처남한테서 전화가 와서 난리가 났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집으로 계속 전화를 했던 모양이었다.
“자네 조금 전에 우리 동네 왔었다며?”
“ 예 ”
“뭐 때문에..”
“형님도 아시겠지만 뽕을 했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뭐 뽕?...”
“데려간 사람이 내 친구 00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고 하여
범죄자를 데려왔지만 친구라고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전 00을 검거하여 차에 태울 때 아마 동네 사람들이 보고 “저 형사 노 형사네 둘째 사위 아닌가?” 하면서 처남에게 전했던 모양이다.(장인도 영주에서 형사반장 출신이었다)
처갓집 옆이고 나이가 비슷하여 짐작은 했지만 그런 것을 물어보면 도리어 방해가 되어 모른 체 했었는데 처남 친구라 한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영주까지 가서 검거한 피의자를 석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나머지 투약자 4명과 함께 구속시켰다.
구속을 시켰지만 교도소로 보내기 전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친절하게 해 주었고 송치될 때는 고맙다고 하며 갔다.
그 이후로 처가에 잘 가지도 못했고 한동안 소통을 하지 않았었다.
말은 안 했지만 처남은 처남대로, 곤욕을 치렀을 것 같았다.
10개월이 지나 전 00일당이 대구교도소에서 출소를 하면서 출소했다고 아침에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는 반갑다고 하고는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시내 중앙통 여관에 있다는 하여 찾아가니 신발을 둔 체 뒷문으로 나가고 없었다.
그냥 인사치레로 전화를 했는데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새벽에 출소를 한 다음 마중 나왔던 누군가와 같이 여관에 투숙하고는 그곳에서 또 필로폰을 투약한 것 같았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해서 그냥 돌아갔는데 그리고 몇 년 뒤, 시간이 흐른 후 영주 처가 동네에서 만나서 그때 어디 갔었냐고 물어보니 멋쩍게 웃으면서 “한잔 하고 또 잡힐까 봐 내뺐다”라고 해서 그냥 웃어넘겼다.
(필로폰 1회 하는 것을 그냥 한 잔 한다고 표현한다)
추후 부산 용팔이는 지명수배를 해두었더니 서울경찰청팀이 거제에서 검거하였는데 당시 유명한 연예인을 포함하여 수십 명이 관련되어 연예계가 언론에 질타를 받으며 한때 시끄러웠었다.
우리가 검거를 했어야 했는데 너무 아까웠다.
당시 검거된 연예인들은 지금도 이름을 말하면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수배시켜 놓은 사건 조사를 위해서 교도소에서 접견 조사를 했다.
조사를 하면서 당시 어디에 있었냐고 하니 집으로 들어 갈려고 하는데 안 보던 차량이 있어 멀리에서 보다가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본래 필로폰 투약자들은 항상 모든 사물과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관에 있을 때는 창문 틈새를 휴지로 막기도 하고, 도박을 할 때는 잠을 안 자려고 투약하기도 한다.
때로는 과도한 양을 투약하여 취해 있을 때는 사리분별을 못하고 맨몸으로 거리를 활보하거나 자해 행위를 하는 등 사고가 많이 난다.
필로폰은 일본어로 히로뽕이라고도 하면서 에페 트린이 주성분이다.
일본이 동남아 전쟁을 하면서 병사나 동원된 인부들에게 필로폰을 투약하여 정신없이 전쟁에 임하게 되면서 사용한 것인데 전쟁 후에는 사용을 못하게 에페 트린에 염산을 혼합하여 염산 에페 트린으로 유통을 하였다.
하지만 염산만 추출하면 필로폰이 제작되는데 대학 화공과 출신이면 누구나 제조를 할 수 있다.
필로폰을 먹기도 하지만 1회용 주사기를 이용한 정맥 수사를 통하여 신체에 주입하기도 하는데 그 후유증이 대단하다.
살 빼는 약이라고 유혹도 하는데 몸에 있는 기름기를 전부 배출토록 하며 한 번이라도 투약을 하면 당뇨와 간질환을 겪게 되어 단명을 하므로 아예 모르고 사용치 않아야 한다.
일본에서는 필로폰을 제작하다가 검거되면 사형을 시키므로 우리나라에서 제조하여 일본에 밀수출도 많이 했었다.
우리나라도 법을 개정하여 필로폰 제조자는 사형, 무기까지 법을 엄격하게 하자 국내 생산이 중단되고 중국과 북한에서 제조하여 국내 반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마약 청정국이라고 하지만 요사이는 이름도 올리기 싫은 종류의 마약들이 들어오고 있어 걱정이다.
마약을 하게 되면 구토를 하기도 하고, 무기력, 침울, 발작, 경련, 동공 축소, 흥분, 헛소리, 광분 등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행동들이 나오기 때문에 절대로 가까이하면 안 된다.
한국 마약퇴치 운동 본부 1899-0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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