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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짱 Jun 13. 2022

개구리 소년(상)

◆ 아이들이 없어졌다.◆ 

1991년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대구 서부경찰서 형사계에 근무 중 동원 되어 수사를 하였고, 11년 6개월 뒤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경찰청 강력반장을 하면서 또, 동원 되어 수사를 하였지만 해결을 하지 못하고 2015년 시일이 지나 내사 종결된 사건에 대하여 비난이 있을지라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발생지 관할 경찰서 형사과장으로 퇴직을 했지만 정말로 아쉽고, 아쉬운 사건이었으며 진실이 묻힌 체 구천을 떠 돌고 있을 소년들의 영혼에 기도를 드린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타 경찰서에서 동원되어 수사본부 지휘에 의하여 수사를 했고, 지시하는 곳으로 출장 가는 등 일정 부분만 수사를 하여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미숙한 점이 있을 수 있다. 


내용 전체를 파악하려면 본부 요원이 되어 지휘부의 지시를 받아 수사명과부(형사들의 일일 수사 지휘 명령서)를 작성하고, 현장 수사를 한 요원들의 수사보고서를 받아 챙기며 상부에 보고서를 만든 사람들이 제일 잘 알 것으로 본다.


본부 요원 역시 휴일 없이 진행해야 하는 고된 업무이고 보니 이런저런 핑계로 탈출(?)을 하려는 형사들이 많았다. 


나는 수 없이 진행된 수사회의를 하면서 듣기도 하고, 발표도 했기에 당시 수사 진행 상황을 알 수 있었고, 수사에 참여한 수사요원 대부분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생각이 된다.


공소시효도 지났고 수사를 했던 사람들 거의 퇴직을 했기에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진실을 다시 한번 알아보자는 생각일 뿐이다.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묻힌 일이기에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근래에 들어 어느 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기도 했고 자료 제공도 한 적이 있지만,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오직 하늘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뿐이라 생각을 한다.


나름대로 수사에 참여한 부분들 중 내가 겪고, 맡은 일들만 적어 보려고 한다.  


◆ 아이들이 없어졌다 


1991년 3월 26일 당시 대구 성서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우철원(당시 13세) 군을 비롯한 조호연(당시 12세)·김영규(당시 11세)·박찬인(당시 10세)·김종식(당시 9세) 등 다섯 어린이가 집 뒷 편인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실종된 사건을 말한다. 


아이들이 실종된 날은 5.16 군사혁명 이후 중단됐던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해 기초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가 있던 날이다. 


임시 공휴일인 이유로 학교에 가지 않았던 어린이들은 와룡산에 오르기 전 인근 마을에 사는 학교 친구와 마을 주민들에게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1991. 1. 29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과 함께  미제 사건 중 하나이다.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이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왜곡된 것이 초기에 널리 퍼지면서 "개구리 소년"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5명의 초등학교 학생이 그것도 같은 날 동시에 실종된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사건 발생 2년 후인 1993년에는 KBS 1 TV의 사건 25시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심층적으로 방영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공중전화 카드, 엽서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린이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까지 대대적으로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남녀노소 대부분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할 정도였다. 


당시 정부는 경찰과 군인 등을 35만 명을 투입하여 현장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 없이 미제 사건으로 묻히는 듯하다가 사건 발생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에 성산고등학교 신축 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끝내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2006년 3월 25일 24시에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초동 수사 


1990. 10. 5 대구 달서경찰서가 신설되었지만 경찰서 건물이 없어 성서공단에 있는 공장에 공장건물 일부와 컨테이너에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고, 1990. 11. 28 현재에 위치한 장소에 공사를 시작했다.


완공된 건물에서 업무를 보는 게 아니라서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하게 일 처리가 되고 있었고 지자체 선거 날 아이들이 없어진 것이었다.


초임 서장으로 부임하셨던 남덕진 서장님(작고)은 임시 청사에 있지 않고 아이들의 주소지 옆에 있는 성서파출소 옆 건물에서 모든 사무를 보며 실종 사건 지휘를 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고 동대구역과 버스 터미널(동부, 남부, 서부, 북부)등 대구에서 시외로 나가는 곳을 중점으로 자체 수사를 하다가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대구경찰청 차장을 본부장으로 한 수사본부를 구성하면서 각 경찰서에서 정예 형사 1개 반씩을 동원하였는데 당시 나는 서부경찰서에서 수사본부에 동원된 것이었다. (동원 날짜는 기억이 잘 안남)


전국 새마을 중앙회 등 각종 사회단체들은 700여만 장의 전단을 전국에 뿌렸고 한국 담배 인삼공사와 기업체들도 담뱃갑과 상품에 실종 어린이들 사진을 인쇄, 수색 작업에 동참했다. 


부모들은 생계를 내던지고 아이들의 사진이 크게 들어간 현수막을 1톤 화물차량에 두르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녔다.


시골 면 단위까지 돌며 면사무소나 파출소에 확인을 하고 모르고 있거나 관심이 없으면 바로 도청이나 중앙 정부에 항의를 하여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공직자들은 개구리 소년들을 알고 있어야 했다.


형사들을 비롯한 경찰관들은 수첩에 소년들 사진을 오려 붙여 다니고 또 상부에서 점검도 했었다.


성서파출소 옆 별관에 설치된 수사본부에 가니 각 경찰서에서 동원된 형사들과 대구경찰청, 달서경찰서 형사 등 100여 명이 넘게 북적거렸다.

     

수 색 -


동원이 되고 나서 초창기에는 와룡산 수색이 주된 일 이었다.


출근을 수사본부로 하면서 형사 1개조가 1개 소대를 지휘하며 동원한 전, 의경들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와룡산의 남쪽 지역을 각자 구역으로 정하여 산 하부에 있는 밭에 일렬 횡대로 탐침봉을 소지 하고 서서 시작을 하지만, 올라가면서 계곡, 가시덤불이 있다가 보니 정상으로 올라 갈수록 종대로 변하게 되는 모양새였다.

(아이들이 발견된 곳은  와룡산 동쪽이었고 군부대 사격장 뒤쪽이라수색에 소홀한 면이 있었다)


증간중간 호통을 치며 독려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수색에서 성과가 없자 전체 수사회의에서 아이들이 없어진 성서지역을 중심으로 전과자, 부랑자, 넝마주이등 집단 거주자들, 정신이상자, 마약 전과자등을 상대로 수사해 보자는 의견이 나와서 먼저 현장 인근지역인 달서, 서부, 남부 지역부터 수사했지만 효과가 없어 대구 시내 전 지역에 대하여 확대 수사를 했다. 

     

이 역시 효과가 없어 또, 수사회의를 하면서 달서경찰서 형사들은 각종 신고 출동 수사에 동원을 하고 각 경찰서에서 차출한 형사들은 앵벌이를 하거나, 섬 같은 곳에서 강제 노역하는 곳으로 팔려 갔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출장 수사를 시켰다. 

     

주로 경남 진주, 삼천포, 고성, 통영, 거제, 김해 지역등 배치를 하면서 우리 조는 진해로 배당이 되었다.


진해에 가서 여관을 정하여 구역을 바둑판 같이 나누어 다니면서 수사를 하고 매일 저녁 9시에 본부에 전화를 하라고 하면서 여관 전화번호를 남기라는 것이었다.


진해는 대구에서 한 시간 거리임으로 낮에 적당히 수사를 하고 대구로 올라올까 싶어 밤 11시가 되면 수사본부에서 여관으로 확인 전화가 왔다.


진해는 해군 사관학교뿐만 아니라 해군 여러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통제 구역이 많았다.


부대 주변이나 해안 초소는 제외를 했지만 무인도가 몇 군데 있어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는데 무인도에 가는 배가 없어 사비로 목선을 빌려 군 생활 중에 익힌 노 젓는 방법으로 조그마한 섬까지 수색을 하면서 일주일을 넘게 수사를 했는데도 소득이 없었다.


섬 수색을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손바닥에 물집이 터져 피가 나기도 했다, 혹시나 내가 거쳐 간 곳에서 소년들이 나중에 나타난다면 그 뒤의 후유증을 감당할 수가 없어 부지런히 다녔다. 

(면피용이 아니고 진실임)


진해는 군인 도시라 항상 깔끔했고, 질서 정연한 도시 같이 보였고 다른 도시와 달리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었다고 기억이 된다. 


덕분에 진해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니 진해 시내를 지도로 그려 보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수사를 함에도 성과가 없자 출장 중인 수사요원들 전원을 철수시켜 대구로 돌아와서 다시 와룡산 수색 및 신고 사건 출동을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신고 받고 배당을 받아 출동하였던 것들을 하나씩 열거한다면 너무 많아서 생략함)


전국 경찰에 개구리 소년들을 찾으라고 지시가 내려갔지만 올라오는 것은 허위 제보나 뜬금없는 신고였다. 하지만 하나하나 확인을 해야 되니 일들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타 지역으로 가지 않고 사투리가 통용되는 영남지역에서 앵벌이 조직에 넘어갔거나 앵벌이를 하면서 현실에 재미를 붙인 채 신분을 속이고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우리 조는 다시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 


출장 -


부산의 남서쪽인 몰운대, 다대포부터 시작하여 감천항, 송도, 태종대, 부산항, 감만 부두, 이기대 공원, 광안리, 해운대, 부산교대, 동래온천 주변과 지하철을 중심으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면서 탐문을 하고 수색을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보름 만에 철수를 했다.


부산 시내를 걸어서 구석구석 돌아다니기도 했고, 지하철을 타고 하루 종일 다니며 껌팔이 아이들 뒤를 따라 다녀보기도 했다. 부둣가 창고들을 기웃거리다가 경비원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누가 보지도 않고, 점검도 하지 않았지만 사명감 하나로 다녔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종업원들에게 소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탐문을 하였지만 결과는 없었다.


                               발생 당시 형사 수첩 제일 앞장에 소년들의 사진을 붙이고 다님



넉넉지 않은 출장비가 부담이 되어 차를 운행하며 다닐 수 없어  거의 대중교통을 이용 하였으며 내의 등 옷은 여관에서 빨아 입거나 새로 사서 입고, 입던 옷은 쓰레기통에 그냥 버리기도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사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자부를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또다시 신고에 대한 확인 수사를 하는 중,


1991. 10. 17. 21:50경 서구 비산동에 있는 나이트클럽인 거성관에서 16명이 사망하는 방화 사건(추후 연재 예정)이 발생하여 원대 복귀 명령을 받고 서부경찰서에서 약 15일간에 걸쳐 방화 수사를 마무리하고 그대로 근무를 할 줄 알았는데 다시 개구리 수사본부로 가게 되었다.


밑도 끝도 없는 수사에 동원되어 수사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며 다니는 것에 진저리가 났고 어디 병가를 내거나 도망칠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직자로서 상사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어 싫었지만  다시 수사본부로 가게 되었다.


그러던중, 1991년말 동원 되기 전 검거하였던 노숙차량 전문 절도단 검거(추후 연재 예정)와 여러 가지 실적으로 경사로 특진을 하였고, 1992년 인사이동이 있어 형사 기동대로 발령이 났다.


아! 이제 지긋지긋한 개구리 본부에서 탈출을 하는가 보다 했는데 당시 경찰청 강력과장을 하셨던 이00 과장(치안감까지 승진하였다가 퇴직)이 형사기동대에 가도 내 부하니까 그냥 본부에서 계속 수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아 계속 본부에서 수사를 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특별지시와 현상금 4200만 원,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5만 명의 수사 인력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적은 찾지 못했다. 


1992. 8 하순 여름휴가철이 거의 끝나갈 즈음 수사본부 석회 시간에 전체 회의를 했다.


이틀 전 제보에 의하면 40대로 추정되는 남자가 전화로 ‘개구리 소년들이 경북에 있는 모 건물 지하실에 매장되어 있으니 발굴해야 한다. 이 내용은 80% 틀림없다’라는 제보가 있어 어디 사는 누구냐고 신원을 묻자 전화를 바로 끊었다는 것이다.


제보를 받았는데 수사를 안 할 수 없는 일이라 본부에서 00마을인 00농장과 00농장을 답사한 후,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놓았으니 내일 아침에 수색을 간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동원된 형사들에게 각자 임무를 부여하고 대형버스 2대에 60명이 넘는 인원을 태워 오전 11시부터 마을을 뒤졌지만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은 기가 찼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지하실에 설치되어 있던 건물에 대해 주민의 안내를 받아 수색작업을 하였지만 결과는 뻔했고 매장 흔적 같은 것은 아예 없었고 신고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이 과정에서 수색하는 것을 취재 중인 기자 20여 명이 주민들에게 붙잡혀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수색을 하는 우리 형사들에게는 그저 욕설만 했지만 기자들이 주민들에게 없는 사실을 자꾸 물어보니 카메라 기자와 운전기사들을 동사무소 안에 감금을 하고 마구 때린 뒤 차량과 카메라 등을 부수기도 했다.


일부는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무법천지가 되었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지휘부에서 주민들에게 신고가 접수된 사건이고 국민적 관심 사항이라 기자들이 선을 넘는 질문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해를 하라며 다독거려 가라앉힌 후, 압수수색 영장을 보여주며 다른 장소 수색도 응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감금되었던 언론인들을 풀어주고 우리는 형식적으로 3개 건물에 수색을 한 뒤 앞으로 이 지역이 의심이 간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든지 임의 수색을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다고 하며 철수를 했다.


감금을 당했던 언론인들은 각자 사무실로 돌아가 경찰이 수색한 내용을 조금은 악의적인 편집을 해서 보도가 나가자 이들 주민 70여 명은 트럭과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KBS, 영남일보, 기독교 방송을 차례로 찾아가 난동을 부리고 기자들을 납치해 마을 광장에 세워두고 공식 사과와 명예 회복을 요구했다.


00군수와 경찰서장이 이들을 찾아가 언론인들 석방을 하도록 요구를 해서 주민들은‘ 터무니없는 제보를 사실 확인도 없이 그대로 보도해 마을이 회복할 수 없는 명예회복을 당했다’고 주장하여 경찰은 마을 주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은 채 사건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주민들의 납치, 감금, 폭행 등의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면서 일단락 지었다.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지휘부가 확인을 하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뭐라도 수사를 하여 빨리 해결을 하고 싶은 욕심에 무리하게 진행을 했고 또, 언론사에 취재자료를 넘겨주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원된 우리 형사들은 지휘부 뜻에 따라 움직이다가 보니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이외에 엉터리 제보에 휘둘리며 보낸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


실종사건을 틈타 들어오는 몰상식한 시민의 제보가 너무 많아 하나하나 출장을 가서 확인을 하는데 수사 인원과 수사비가 너무 부족했다.


답답한 마음에 무속인을 찾아 물어보고 무속인이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여 달밤에 논두렁을 헤매기도 했지만 허사였고, 와룡산 밑에 있는 자그마한 배실 못 물을 전부 퍼내 보기도 했으며, 혹시 아이들이 식용 개 농장 옆을 지나다가 사나운 개에 한 명이 물리자 주인이 아이들을 전부 어떻게 했을까 싶어 개 농장을 포클레인을 파헤쳐 보기도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론과 언론의 집중포화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수사본부를 유지해 가던 중 실종 5년째인 1996년 1월에는 다섯 어린이 중 한 명이 자신의 집에 암매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굴착기와 곡괭이 등으로 집안 화장실과 부엌 바닥을 파는 소동이 벌어졌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교수, 박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동원된 형사뿐만 아니라 전 경찰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면서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수사를 하였지만 해결이 안 되어 경찰의 자존심도 내팽겨 치며 무속인에게 까지 손을 벌렸었는데 ..


이처럼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사건이 장기화되자 한때 '외계인 납치설', '북한 공작원 유괴설', '불치병 치료용 희생설' 등 갖가지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수사회의를 하면서 예상되는 일들을 논의하며 몇 개월을 더 수사를 했는데 진전이 없자 지방청 수사과와 달서경찰서 형사들만 남고 원대 복귀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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