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
에피파니
버스는 서울을 돌고 돌아
내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에 도착했다
낮은 건물들이 서로의 영광을 의지하는
서울 어느 버스 종점이었다 까만 밤을 배경으로
저 멀리 백조가 보였다 아무렇게나 구부려 만든
백조 네온사인은 날개 하나를 잃었는데 모텔치고
비열하게 낭만적이었고 졸렬한 상징이었다
카운터 플라스틱 벽 아래 뚫린 반달 모양의 구멍으로
두꺼운 혀처럼 내밀어진 열쇠 하나가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4층으로 향했다 복도 바닥의
빨간 카펫은 밟을 때마다 얼룩을 피워 올렸지만
어느 방에서는 태양이 자랐다가 시들었고 또 다른
방에서는 청순한 사랑이 드디어 은둔을 끝내고 새로운
절망으로 피어났다 백조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엮느라 잃은 날개 하나쯤은 잊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
그리하여 나는 그 붉은 복도, 백조의 심장에서
의지 없이 흐르는 시간을 벗을 수 있었다
사방은 어둑했고 시계는 없었다
내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서울을 돌고 돌아
저 멀리 백조의 깃털 위에서 나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꿈을 꿀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반복이 아무도 모르게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