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솬빠 Sep 24. 2024

39년생 아버지의 고집. GO집!

엄마의 입원

아버지는 건강을 점차 회복했고. 아프기 전만큼은 아니지만 지팡이와 함께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화장실만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던 엄마의 바람보다 좋은 결과였다.


나는 아버지와 3개월에 한 번씩 서울 병원에 동행했다. 우리는 기차에 나란히 앉아 수다 축에는 못 끼는 짧은 대화들을 잠시 잠시 나누었다.

"요즘 몸은 좀 어때요?"

"다리가 좀 저려서 글제. 다른 건 괜찮애. 늙으먼 다 글제"

"..........."

"..........."


"화장실 가고 싶으면 기하요"

"괜찮애. 병원 가서 소변 검사흘라믄 지금 가따오믄 이따가 안 나와"

".........."

".........."


우리는 간헐적으로 대화했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병원 진료를 보는 날에는 형도 휴가를 내고 함께 했다. 아버지는 회사까지 쉬고 오는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또 고마워했다.

"난 아들 둘이랑 병원에 온께 겁나 기분이 좋다. 딴 사람들 봐봐라 아들 둘이랑 온 사람 없잖애"


아버지가 아프고 우리 가족은 이전보다 더 자주 연락하고 만나게 되었다. 만남이 잦아진 만큼 서로 더 돈독해졌다.




그렇게 아버지가 회복 후 3년을 채워가던 2023년 10월 23일 오후 3시.

이 시간에 전화하지 않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불안했다.


"어쩌끄나? 좀 와봐야긋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들이 심장의 rpm을 올렸다.

"내가 넘어졌는디 팔이 부러졌다"

고조되었던 긴장감은 팔이 부러졌다는 말에 그나마 안심으로 바뀌었다. 엄마 아버지에 대한 걱정 속에는 항상 '죽음'이라는 단어가 함께였다. 그래도 골절은 죽는 건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구례에 있는 병원에 도착하자 엄마는 팔의 통증과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이 잘 섞인 얼굴로 응급실 침대에 앉아있었다. 아버지는 엄마 옆에서 자기 팔이 골절된 마냥 참담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구례에서는 엄마를 간호할 사람이 없었기에 여수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구례 집에서 혼자 지내겠다고 했다. 실랑이가 시작됐다. 아버지는 평생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사신 분이다.

“아부지 밥 챙겨줄 사람도 없는디 어찌 혼자 계신다 그래요?”

“걱정하지 마랑께. 내가 안 해서 글제 하먼 잘 해. 난 집에 있으껀게, 니 엄마만 델꼬가”


내가 국민학교 적 엄마가 며칠 집을 비웠을 때 아버지가 쌀을 손으로 씻지 않고 숟가락으로 휘휘 몇 번 저어서 행군 후 밥을 해줬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요리에 서툴렀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아버지의 요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언제나 아버지는 차려진 밥을 잘 먹는 역할이었다.


“다리 힘도 없으신디 혼자 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집에 해야 될 있도 있고 난 여기 있으껀게 더 이상 말하지 마!”

아버지는 자신의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부렸다. 39년생 아버지의 고집은 늙지 않고 아직 팔팔했다. 의지를 꺾을 수 없어 여든 중반의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시골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엄마를 여수 병원으로 모시고 왔다.               

다친 엄마보다 혼자 있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수치가 더 높았다. 결국은 경기도의 형수님이 아버지를 챙기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구례로 내려왔다.


엄마는 여수의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은 팔의 부기가 빠져야 해서 이틀 후로 결정됐다. 엄마는 수술 공포증이 있다. 오른쪽 무릎 수술을 하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반대편 무릎은 수술할 엄두를 못 내고 고통을 참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엄마는 수술을 앞두고 울상이 되어 있었다. 마치 나의 아들 녀석이 예방주사 맞으러 갈 때 표정같았다. 걱정하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가 왜 다쳐가꼬 니들 고생을 시킨다냐?"

"우리가 뭔 고생이여. 엄마가 고생이제"

수술도 걱정, 자식들도 걱정. 엄마의 얼굴은 걱정 투성이었다.

  

수술은 잘 끝났고 마취가 풀리자 엄마는 괴로워했다.

질끈 감은 눈, 앙 다문 입, 아픔 가득한 호흡. 엄마의 시간은 째~~~~~깍 째~~~~~깍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통제를 맞고 있음에도 하루를 꼬박 고통스러워했다.

    

‘엄마가 수술을 했으니 가서 봐야지요’하며 구례에 있던 아버지를 모시고 왔지만 아버지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다시 구례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엄마의 팔은 수술을 통해 해결되었지만 아버지의 고집은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았다. 구례에 할 일이 남아서 가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구례로 가서 밭일을 하고, 말린 콩을 타작 하고, 혹시 올지 모르는 비를 대비해 비설거지까지 모조리 끝내고 다시 여수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여수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첫날부터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이전 09화 아버지가 퇴원하자 엄마는 야위어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