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침침한 백열전등 아래, 소박한 외갓집 아랫목 한편에서 나는 세상에 나왔다. 나의 첫 공간은 외할머니 방. 두 동생들은 모두 병원에서 태어났다는데… 엄마와 외할머니의 용기와 사랑 말고도, 당시에 또 다른 사연이 있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아무튼 엄마의 산후조리를 해주시며 갓난아기였던 나를 매만져 주신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우리가 사는 집과 할머니의 집은 멀었다. 그래도 엄마는 아주 가끔 나만 데리고 할머니에게로 갔다. 두 번의 전쟁을 호되게 겪으시고 대부분의 생애를 지독한 결핍 속에 사셨던 외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오래도록 같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단다. 50년을 헐벗고 사느니 10년만 살아도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사는 게 낫다고... 말 잘 듣는 셋째 딸, 엄마는 저보다 갑절이나 나이 많고, 돈도 많은 사업가의 재취로 시집갔다. 훗날 내 아버지가 된 그는 외갓집의 밀린 쌀값은 물론이요, 생활비와 이모와 삼촌의 학비를 대어주었으나, 엄마에게 말했던 "언젠가 다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끝내 지키지 않았다.
엄마에게 감당할 수 없는 날이 찾아오면 엄마는 나를 들쳐업고 엄마의 엄마를 찾아갔다. 할머니가 끓여주신 뜨끈한 고깃국은 맛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보았던 마당 귀퉁이 토끼장 속 토끼 가족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놀라고 슬펐다. 뭘 어쩔 수 없던 그 내 마음이 어쩌면 당시에 엄마가 때때로 느꼈던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세 살, 네 살 터울의 두 동생들과 달리 나는 희미하지만 외할머니의 모습과 그 푸근한 가슴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외할머니는 그래도 엄마와 우리가 넉넉한 형편으로 잘 살고 있을 때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