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 시리즈 열일곱 번째 금호동
공학도였으나 졸업 후 신학생이 된 남편은 교회에서 전도사로, 강도사로 일을 했다. 그러나 목사 안수식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안수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거꾸로 사는 삶'이라는 책을 읽고 깊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목사가 되면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힘들 것 같다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도 알 것 같았다.
새로운 일터를 찾던 중, 아동 수제화 제작과 판매로 창업하신 둘째 시숙이 일감을 주겠다고 하셨다. 감사하게도 사업이 번창할 때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다만 집에서 직장까지 너무 멀어서 우리는 구두 공장과 매장이 가까운 금호동으로 부랴부랴 이사했다.
방이 셋인 넓고 아름다운 집이다. 햇살도 좋았다. 어린아이 셋과 함께 오르내리기에는 쉽지 않은 4층이라는 것과 기름보일러여서 난방비가 부담스럽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 후 가장 좋은 집에서 살게 됐다.
거실과 부엌이 분리되어 있고, 바닥은 큼직 큼직한 타일이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난방을 살짝 줄여도 타일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아이들이 넘어지면 다칠까 싶어 거실에는 큼직한 카펫을 깔았다. 4층 계단도 그렇고 또 어차피 집 근처에는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도 없으므로 아이들은 거의 집에 만 있었는데 그래도 답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층이라 옥상을 쓰기가 만만해서 좋았다. 겨울에 눈 쌓인 옥상에서 세 아이들은 장갑 낀 조그마한 손으로 눈을 꾹꾹 눌러 모아 뭔가를 만들기도 하고 뿌리고 던지며 즐거워했다.
아이들과 함께 종일 먹고 치우고 씻기고 놀고 책 읽고 뒹굴면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시절이었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이 고만 고만할 때 벌써 이런저런 기관에 보내기 시작한다지만 나는 아직 내 아이들을 세상과 나누는 게 아까왔다. 우리는 우리들 만의 세상에서 충분히 행복했다. 셋 모두 취학 전, 딱 한 해 동안만 유치원에 다녔다. 첫 아이는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보냈는데 그곳은 즐거운 두어 시간 함께하다가 간식을 먹이고 하원시켰다. 간식은 엄마들이 돌아가며 준비했는데 내가 당번이 되면 나는 간식을 들고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복도 창으로 교실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장남은 항상 웃고 있었다.
간식으로 당근 케이크나 과자를 구워서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 금호동 태양빌라에서 처음으로 아래쪽에 오븐이 달린 가스레인지를 사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오븐레인지를 포장했던 아주 큼직한 갈색 종이박스의 몇 군데에 창과 문을 만들어 놀이집을 만들어 주었고, 온 식구가 종이집의 이곳저곳을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꾸며 놓으니 아이들은 들락거리며 잘도 놀았다.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당근 케이크, 단호박 케이크의 빵내음을 아이들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금호동 일대에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태양빌라 402호를 떠나야 했다.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의 설렘을 추억으로 남기고 그 해 첫여름방학에 우리는 또다시 이사했다. 금호동 우리 집이 있던 곳은 이제 고층 아파트 숲으로 변했고 은근히 언덕 진 추억의 골목길은 영영 사라졌다. 그러나 아침마다 옥상에 뛰어올라가 작은 산 중턱의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던 기억, 엄마에게 답해주던 아이의 작은 손과 그 미소는 내 마음 한편에 생생히 간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