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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목동아파트의 악몽과 기적

살던 집 시리즈 열여덟 번째 양천구 목동

by 조은미

금호동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때, 목동 아파트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는 친구 부부가 목동으로 이사 오면 좋겠다고 추천했다. 비슷한 또래인 서로의 아이들도 우리처럼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어 기꺼이 이웃이 되었다. 전셋집이었지만 결혼 후 처음 살게 된 아파트. 곳곳에 나무들과 벤치 그리고 놀이터가 많아 놀랐던 곳. 쾌적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감사했고 종종 지척의 친구네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29평에 방이 세 개, 그중 두 개는 작았는데 첫째와 둘째에게 이층 침대를 주며 같이 쓰게 했고 다른 한 방에서 막내가 친정 엄마와 함께 잠을 잤다. 안방의 한쪽 벽면은 온 가족의 책으로 채워졌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책 읽기를 좋아했다. 나도 아이들이 잠들기 전 방마다 돌며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행복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큰 아이를 위해 남편은 두툼한 두산 대백과사전을 구입하여 아이의 손이 쉽게 닿는 책장의 아랫칸에 꽂아두었다.


엄마가 쓰시던 오동나무 서랍장의 상단 일부를 분리해서 미색으로 리폼하고 거실장으로 사용했지만 세월이 흐른 후, 엄마의 세월이 배인 장을 버려 놓았다는 생각에 두고두고 후회했다.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금방 적응하며 즐거워했다. 복도식 아파트여서 현관문에 고정발을 걸고 활짝 열어두면 여름에도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한 맞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이렇듯 만족스러웠던 이곳에서 내 평생 가장 놀라고 가장 슬프고 가장 간절하고 또 감격스러운 일을 겪게 될 줄은 '그날' 전까지 결코 몰랐다.


그날, 집에는 친정 엄마와 첫째, 둘째가 있었다. 나는 감기 기운 있는 막내를 데리고 이대 목동 병원 소아과를 갔는데 아이의 진료가 막 끝나갈 무렵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딸아이가 오빠를 따라 함께 놀러 나갔다가 큰 아이 친구 집 현관 철문에 딸 애의 손톱 아래 첫마디가 절단되었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고정발이 고장 난 현관문이 세찬 맞바람의 속도 그대로 닫히면서 손가락이 끼인 것이다. 119 구급대가 아이를 싣고 목동 병원으로 가고 있으니 응급실 앞으로 나와 있으라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울면서 떨면서 전화했다. 남편이 달려왔다. 이대 목동 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여동생은 친구가 간호사로 있는 서울 을지로의 백병원에서 접합수술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고 급히 다시 119의 도움으로 백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았다. 의사가 말하기를 만일 예리한 물체로 절단되었다면 접합 성공률이 높지만 둔탁한 철문에 신경을 포함한 피부와 뼈가 뭉개진 상태여서 일단 붙여놓기만 했다며 손끝이 살아날 확률은 크지 않다고 했다. 인조 손가락 사용을 염두에 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회복실로 온 아이의 손을 보았다. 붕대로 부풀려진 아이의 손가락, 여전히 작은 손이었다.


둘째로 태어난 딸아이는 예정일보다 꽤 일찍 세상에 나왔다. 인큐베이터에 있는 동안 나는 초유를 착유해서 냉동실에 모아 두며 아기를 기다렸다. 집에 돌아와 초유를 다 먹고 나서는 그 조그만 입술과 혀로 야무지게 나의 젖을 빨았고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이 절박한 시간에 그때가 생각났다.


병원에서, 집에서, 교회에서 흩어져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기도했다. 작은 미세 혈관들이 속히 자라나 끊긴 부위에 산소가 공급되어야 손 끝이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피부를 통해 산소를 공급하는 치료인 고압 산소통에 들어가서 산소를 쏘였다. 나는 매번 아이와 함께 통 안으로 들어갔다. 눕거나 엎드리기 만 가능한 좁은 공간에서 처음에는 말없이 꼭 안고 만 있었다. 수없이 들락거리며 익숙해지자 우리는 통 안의 소음을 뚫고 이야기도 하고 함께 노래도 불렀다. 산소통에서 나오자마자 아이의 손가락은 발그스름한 꽃처럼 피어올랐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 검게 죽어가기를 반복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했다.


아이는 다른 치료도 잘 견뎌냈다. 수술 부위에 고인 죽은 피를 의료용 거머리를 붙여 뽑아내는 치료이다. 배고픈 거머리에게 검은 피를 나누어주면 손가락이 예뻐진다고 했다. 아이는 시커면 거머리 몇 마리를 손가락에 붙이고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홀쭉했던 거머리들의 몸뚱이가 터질 듯 탱탱해지면 그날의 치료가 끝났다.


기도와 함께 이 두 가지 치료를 한 달 가까이했을 무렵, 주치의 입에서 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통상 5세 미만의 아이들의 생체 활동은 활발해서 미세 혈관이 빨리 생기지만 이미 6세가 넘어 기대하지 않았었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사례를 학술지에 올릴 거라며 다만 절단 시 이미 성장판은 손상되어서 손가락 끝 마디는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감사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며칠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딸아이가 퇴원하고 정확히 한 달이 지나서 나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아이를 수시로 안고 병실과 치료실을 오고 간 것이 약한 허리에 무리가 됐다. 마음은 끄떡없었는데 몸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 역시 수술 후 재발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가정을 이룬 후 맞은 최고의 환경에서 가장 어려운 한 때를 나는 완벽하게 보냈다. 6살 손가락으로 스무 살을 맞은 딸아이는 음악을 사랑했고 아름다운 플루트 선율로 한예종에 입학했다. 남편은 종종 딸아이의 손을 만지면서 손가락의 흉터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이야기한다. 추운 겨울이면 다 큰 아가씨의 6살 손끝은 유난히 차갑다. 어느 날 꼭꼭 누르며 마사지해 주다가 혹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손을 숨긴 적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부끄럽지 않다며 누구든 물어보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딸아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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