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 시리즈 열아홉 번째
2000년 2월, 결혼한 지 딱 10년이 되어갈 때 내 집이 생겼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 운전사는 시원하게 뻥 뚫린 자유로를 빠르게 달렸다. 운전사 옆자리에 앉은 나도 곁에 막내아들을 끌어안아 끼워 태우고 자유로를 달렸다. 내 집을 향해 몸도 마음도 신나게 달렸다.
큰 애 둘을 데리고 출발한 남편과 셋째와 살림살이를 실은 내가 탄 트럭은 거의 비슷하게 도착했다. 인테리어 마감이 끝나지 않아, 노을 질 무렵에야 간신히 짐을 모두 내렸다. 어설프게 푼 짐들 옆에서 아직 정리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이리저리 둘러보며 다들 벙실거렸다. 그리고 우리의 집에 처음 배달된 짜장면을 맛나게 먹었다.
화곡동 시댁 집이 팔리는 바람에 생긴 남편 몫에 대출을 얹어 갑자기 장만한 집이다. 살던 동네 목동은 너무 비싸서 외곽 신도시로 나왔다. 직장에서는 더 많이 멀어져 힘들어질 텐데도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젊은 아빠는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했다. 둘째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3월을 염두에 두고 2월 중순에 이사했다.
유명 학원가에서 조금 떨어진 단지의 34평 아파트. 나는 번화하고 바쁜 거리보다 조용한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2층이라 베란다 가까이로 가면 1층 앞 주차된 차들이 보였지만, 일상 중에는 단지 내에 예쁘게 조경된 나무들만 시야에 들어왔다. 앞 동과의 간격도 넓은 편이라 많이 어둡지도 않았다. 여름이면 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시원하게 물을 뿜는 분수대와 그 주변의 뛰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러나 아파트를 살 때에는 팔 것도 염두에 두고 따져봐야 하는 몇 가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장만한 집이긴 했다.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 없이 예산 안에서 오롯이 나의 취향으로 선택한 집이었다.
이사 전에 인테리어를 하려고 전문가를 찾았는데 의뢰인인 내가 더 굽실댔다. 너무 설레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여태껏 크고 작은 일들을 남편과 상의해서 결정하다가 혼자서 이것저것을 정하려니 힘들었지만 해냈다. 거실 벽은 살짝 빗살 요철이 있는 아주 연한 핑크빛의 도톰한 벽지를 골랐고, 방들은 단색의 파스텔 톤으로 했다. 아이 방에는 허리께 쯤 되는 곳에 귀여운 띠벽지를 둘렀다. 바닥은 진짜 나무 마루로 하고 싶었으나 너무 비싸서 그냥 나무 무늬 바닥재로 했다. 베란다의 거실 쪽 문은 맑은 유리를 끼운 미닫이 나무문으로 바꿨다. 여름이면 문짝을 떼어 베란다 구석 끝에 세워두어 거실을 더 넓고 시원하게 쓸 수 있었다. 부엌은 손대지 못해 아쉬웠지만 짐이 대충 정리되자마자 유행 지난 옥색 싱크대 문짝에 바닥과 비슷한 나무 색 시트지를 붙였더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605동 202호 일산 첫 집을 잊을 수 없다. 2002년 월드컵을 마을 마당에서 이웃들과 같이 응원한 일이며 온갖 즐거운 추억들이 깃든 공간이다. 한 살 반에서 두 살 터울의 세 녀석들이 잠시 함께 학교를 다녔던 짧고도 흐뭇했던 시절. 기분 좋게 집을 나선 세 녀석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베란다로 볼 때면 나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됐다.
남편이 형님 사업장의 재무 체계를 세워놓았을 때, 이메일 송금 서비스를 하는 'PayLetter'라는 회사에 스카우트되었고 형님은 기쁘게 동생을 보내줬다. 당시 최초로 유무선 포털사이트와 맞춤형 웹브라우저 등을 지원하는' 나우누리'라는 회사로 출근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하루의 일상을 전달하느라 바빴고 남편은 피곤한 중에도 들어주었다. 특히 아이들의 교육 방향에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맞추어 갈 때면 둘 다 말이 참 많았다.
방과 후에도 큰 아이는 종종 도서관에 머물다 집으로 오는 날이 많아졌지만 아들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학원으로 갔다. 어느 날, 빨간펜 교원에서 나온 책들을 알게 되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사주고 싶었으나 값이 만만치 않아 내가 벌어서 들여놓아야지 마음먹었다. 세일즈 교육을 받고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우리 집의 곳곳에도 책이 늘었고 나는 짧은 시간에 팀장을 거쳐 본부장이 되었다. 내가 바빠질수록 우리의 예쁜 집은 낮동안 점점 더 오래 빈 집이 되었다.
이사한 지 3년 반이 흐른 후, 아이들이 6학년, 4학년, 2학년 1학기를 마쳐갈 무렵,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가요.'라는 책을 읽었다. 가슴이 떨렸다. 마침 미국에서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 지인과 연락이 닿았고 관련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면서 가정교육에 관한 정보와 인연이 속속 이어졌다. 일하면서 교육과정을 좀 배웠다는 것도 용기가 됐다. 온 가족이 참석한 세미나를 마친 후 가족회의를 했다. 그리고 그 해 아이들의 여름방학은 영원히 개학을 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 또한 바꾸고 싶어 또 이사를 계획하고 2003년 집을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