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vs 공공기관 : 업무
급여와 마찬가지로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구분할 때 중요하게 보는 부분이다. 대기업은 일이 많고 공공기관은 적다고 생각할 텐데 이는 업무의 양으로만 봐서 그렇다. 업무의 질도 본다면 나에겐 오히려 대기업의 스타일이 훨씬 잘 맞았다.
대기업의 경우 상당한 자율성이 있다. 내가 무엇인가 해볼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다. 신규 사업 추진을 예로 들어 보겠다. SK에서는 회의를 굉장히 많이 했다. 이 회의는 30분 만에 끝날수도 있고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데, 하루 종일 회의만 하다가 퇴근한 적도 있다. '신규 사업 발굴'이란 주제가 주어진다면 결론이 날 때까지 회의실에서 떠나지 못하고 머리를 맞댄다. 교과서에나 보던 브레인스토밍이 실제로 펼쳐진다. 팀장부터 말단까지 누구 하나의 의견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다. 신입사원이 낸 의견이 제일 좋다면 그대로 추진을 한다.
공공기관의 경우 자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규정과 지침은 거의 모든 업무분야에 명시되어 있다. 동일하게 '신규 사업 발굴'이란 주제가 정해진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규정과 지침을 찾고, 지난 사례를 찾는 것이다. 타기관의 사례도 필수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고, 각자의 업무 분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만 생각하게 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겨도 선뜻 말하지 못한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 적법성 관리가 있다. 업무 감시라고 하는 게 더 직접적인 표현일 듯하다. 대기업에도 자체 감사제도가 있지만 사후 관리 위주로 운영된다.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다. 결재라인도 상당히 간소하고 빠르다. 직원의 비위를 검증하는 별도의 시스템이 있겠지만, 내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지 않았다.
공공기관 업무는 적법상 관리가 핵심이다. 적법한 절차로 업무를 진행하였음을 증빙하고 기록하고 보고하는 게 공공기관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다. 영수증 하나, 문서 하나마다 수많은 결재라인이 있고 승인이 필요하다. 그렇게 최종 승인이 되어도 안심할 수 없다. 자체감사, 정부감사, 국정감사 등 잘못한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애쓴다. 직원 입장에서는 처리한 일이 늘어날수록 옥죄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업무량은 대기업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기업은 자율성을 주지만 업무가 끊기지 않는다. 출근해서 퇴근까지 열심히 일하면 딱 맞을 업무를 준다. 게다가 나만 많은 게 아니다. 차장이든 부장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가 많다. 오히려 나보다 팀장이 훨씬 많은 일을 한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공공기관은 엄격한 업무감시를 받게 되지만 절대적인 양이 많지 않다. 업무가 몰리는 시기가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일할 수 있다. 맡는 업무에 따라 차이는 꽤 있지만 어떤 업무를 맡더라도 대기업에 비해서는 적다. 그리고 팀장, 과장으로 올라간다면 그나마 있던 일이 더욱 줄어든다.
두 기관의 업무는 태생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기업은 사유재산으로 만들어졌고, 수익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혁신과 빠른 판단을 중시한다. 뒤쳐지면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공공기관은 국가재산으로 만들어졌고, 공공의 이익과 편의증대를 목표로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투명성과 적법성이 아주 중요하다. 두 기관 업무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보다 다르다는 점을 확인하는 게 좋겠다. 본인은 어떤 업무 스타일에 어울릴지 한 번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