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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거작가 Oct 22. 2022

임원이 새벽에 카톡을 보낸 이유

정치는 여의도에서 하시길...

 난 눈치가 없는 편이다. 그걸 깨달은 지 몇 년 됐고 바꿔보려 노력도 하고 있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에 비해선 아직 한참 멀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나아진 건 눈치 없는 행동을 알고도 자존심이나 게으름을 이유로 막무가내로 지나치진 않는다.


담당 임원의 보여주기 식 '정치 톡'


 작년에 이직을 할 때였다. 담당 임원은 평소 부하 직원에 대한 리더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부하직원이 자신의 상사에게 인정받을까 안절부절, 견제하기 바빴던 사람이었다. 한 번은 사장 수신, 임원 참조로 보낸 메일을 자신보다 사장이 먼저 봤다는 이유로 씩씩거리다, 자기 방으로 날 부르더니 '이 회사에서 출세하기 위해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하냐?'라고 대놓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랬던 임원이 퇴직하겠다는 나의 의사를 전해 들은 다음날 새벽 5시에 갑자기 카톡을 보냈다. 카톡 내용인즉슨, 나의 퇴직 통보가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워서 밤잠을 설쳤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퇴직 의사를 번복할 수 없느냐는 거였다. 순간 나의 눈치 없음이 발동되면서 임원의 카톡을 진심으로 오해할 뻔했다. 하지만, 진실은 나의 퇴직과 퇴직 후 미래를 걱정한 카톡이 아닌 거였다.


 그 카톡의 목적은 소속 팀장이 퇴직한다고 하는데 제대로 붙잡지도 않았냐는 윗 상사의 질책에 대한 면피용 카톡이었던 거다. 그것도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카톡으로, 더나아가 부하 직원 퇴직에 밤잠 설치는 캐릭터 설정까지 감안한 치밀함이라니. 심지어 사장과의 퇴직 인터뷰를 하게 되면,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게, 나의 뒷모습 관리에 더 좋다는 반 협박조 다짐까지 알뜰히 챙겼다.


 삐뚤어진 마음으로 사람의 선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다 적지 못한 그간의 그 임원의 언행 불일치 사례를 떠올려 보면 매우 합리적인 추론이다.


 원래 조직(회사)이 여의도 정치판보다 때로는 더한 곳이라는 건 알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욕하면서 배운다?

 

 그런데 요즘 나도 임원이 되면서 좀 헷갈린다.


 아직 위 임원처럼 노골적인 정치 행위- 진정성 없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 타인을 기만하는 행위-를 하진 않지만, 최소한 앞날에 벌어질 상황을 염두에 둔 언행들을 하고 있다.

 가령 이런 거다. 필히 가야 될 회의나 장소는 아니지만 안 갔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와 책임을 위해서 참석한다. 혹은 직원의 자기 계발을 위해 항상 조언하고 지원을 해왔지만 이 역시 증명할 길이 없으니 책을 사준다든지.

예전 같으면 '참석해서 발표 안하는 데 무슨 소용이야?' 거나 '책을 사준다고 읽겠어?'와 같이 내 기준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서 안 하던 일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임원으로서 주어진 역할인 지, 헷갈리지만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위를 하고 있다.  (참고로, 사준 책은 역시나 아무도 읽지 않고 부서에 굴러다닌다.)


 임원이 되기 전, 나의 조직 멘토를 찾아가 임원으로서 어찌해야 하는지 묻자, 멘토는 나의 논문 변수이기도 한 '진정성'을 언급하면서 '너 하고 싶은 데로 해라'라고 조언해줬다.

 그런데 일 년 여를 지낸 결과, 멘토의 조언 뒤의 전제를 내가 깜박 못 들은 것 같다.


 너의 상사와 네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먼저 확인하고 '너 하고 싶은 데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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