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이 끝났다. 기획의도도 모두 공유하고 통일했다. 그래도 아직 편집을 시작하진 말자.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 대신 먼저 펜을 잡고 편집해보자.
우리 뭘 찍었지?
1박 2일 (출처 KBS)
일단 촬영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편집하려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근데 '1박 2일'처럼 카메라 20~30대로 찍은 거면 어떡하지? 게다가 A팀 B팀 나눠서 찍었는데? 그것도 며칠을 찍은 거면 어떡하지? 그걸 다 봐야 하나? 갑갑하다.
하지만 그랬다. 지금은 방송 현장을 떠나서 확실하지 않지만, 예전에 리얼리티 예능 편집을 맡았을 때의 과정은 이랬다.
회차 구분 | 촬영 기간이나 장소, 사건을 기준으로 대략 회차당 촬영 분량을 나눈다.
1차(순서) 편집 | 한 회차의 각자 분량을 맡아, 구성없이 촬영이 진행된 순서대로 편집한다.
2차 편집 | 장면 삭제, 보완, 순서 교체 등 구성을 잡아 편집한다.
종합편집 | 자막, CG, 색보정, 음악 등 마스터링 작업한다.
1차 편집은 순서 편집이라고도 불린다. 촬영 순서대로 NG컷을 걷어내며 컷팅하는 단순 편집이다. 이 과정에서 PD는 자신이 맡은 분량의 모든 촬영본을 봐야 한다. 이 과정을 왜 하느냐. 순서대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나온 60분 물 프로그램의 1차 편집본 분량이 5시간이 넘은 적도 있었다! 촬영본이 어마어마하면 1차 편집에서부터 PD들이 녹초가 된다. 그래서 요즘엔 1차 편집만 전문적으로 하는 외주 편집팀에게 맡기기도 한다(제작비 많은 프로그램은 참 좋다). 그 후 2차 편집은 1차 편집본을 보고 구성을 짜서 수정하며 방송 분량을 맞추는 작업이다.
SNS 원정대 일단 띄워(출처 SBS)
2014년에 브라질 월드컵에 관련된 리얼리티 예능 촬영으로, 브라질에서 2주간 촬영한 적이 있었다. 출연자들이 두 세 팀으로 나뉘어 동시 촬영하는 일이 많았고, 최소 4대 이상의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다. 편집 생각을 하면 아찔했다. 그래서 매일 밤 촬영 일지를 작성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다른 팀의 촬영일지도 종합하면, 어떤 사건들이 순서대로 일어났는지 전체 흐름을 알 수 있을 거다. 그 사건들의 리스트로 대략적인 구성을 할 수 있을 거다. 그럼 구성된 사건들의 촬영본을 중심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못했다. 뒤에 보니 촬영 일지는 나만 작성했고... 다들 모든 사건이 들어있는 1차 편집본을 보길 원했다. 결국 난 모든 촬영본을 다 봤고, 녹다운이 됐다.
편집 전 아웃라인 작성(대략적 구성)을 위해 사건들의 리스트를 만든다. 이게 내가 촬영 일지를 적는 목적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3일 후에 모든 촬영이 끝나니까 그때 적어야지. 촬영장이 정신없이 돌아가서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고 피곤해도 적는다. 나중에 편집본을 모두 보고 편집하는 피곤함이 더 끔찍하니까. 열의가 있어도 1차 편집이 끝나면 번아웃이 돼버린다. 덧붙여 작성된 리스트를 보고 기획의도를 벗어난 사건들은 걷어내도 된다. 걷어내서 재밌는 장면을 놓친 건 아닐까? 미련을 두지 말자. 기획의도를 벗어난 장면에서 재밌는 시바이(상황)가 있다 해도 사족이다. 맥을 끊어서, 방송 분량이 넘쳐서, 그럴 때 가장 먼저 날리는 것들이다. 방송 분량이 적을 때 찾아서 넣어도 늦지 않다.
그렇게 리스트에서 살아남은 사건들로 아웃라인을 작성할 수 있게 된다. 아웃라인은 촬영본의 분량이 적다면 편집을 빨리 끝낼 수 있게 해 준다. 촬영본의 분량이 많다면 PD와 작가의 번아웃을 막는다. 이 훌륭한 도구는 촬영본을 모두 보고 작성하는 게 베스트이긴 하겠지만, 많게는 몇 테라 바이트의 촬영본을 모두 보지 않으려면 '촬영일지'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