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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Feb 26. 2023

함께 걷고 기다려줘서 고맙습니다

부부란...


"오랜만에 좀 걸을까?"


어제까지 서울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모처럼 숨 돌릴 틈이 생긴 오늘,

마침 날씨도 화창하니 걷기엔 딱 좋은 날이었다.


집에서 10분만 걸어 나가면 송정 바다를 만난다.

바닷가엔 해운대까지 뻗어 있는 해안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산책로와 나란히 놓인 철로 위로는 해변을 조망하면서 운치 있게 달리는 해안 열차가 지나간다. 그리고 열차 위로는 멀리서 보면 장난감 같아 보이는 깜찍한 스카이 캡슐이 레일을 따라 달린다. 휴일이 되면 해안열차와 스카이 캡슐을 타려는 관광객들로 해안이 붐비기도 한다.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와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고, 볼거리도 많고, 길을 따라 예쁜 카페도 많은 송정 바닷가가 지척에 있는데도, 내가 바닷가 산책을 나가는 일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남편은 집에 있는 날엔 거의 매일 산책을 나가지만 지독한 집순이인 나는 매일 '다음에'를 무한 반복할 뿐, 마음먹고 나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왠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는지 좀 걷자는 남편의 말에 흔쾌히 오케이 하며 채비를 했다.

입던 옷에 외투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산책 끝에 쉬었다 오기로 한 카페에서 볼 책 등을 챙긴 배낭을 메고 현관에 대기했다. 보통은 아내들이 준비하느라 남편을 기다리게 하는데, 우리는 거의 대부분 반대로 내가 미리 준비를 끝내고 남편을 기다리는 타입이다.

나는 J, 남편은 P...

오늘도 어김없이 기다리는 나를 현관에 세워놓고 여유 만만하게 이것저것 가방에 집어넣고 계신 남편님..

드디어 준비를 완료하고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나오신다... 언제쯤 나보다 먼저 현관에서 기다려 주실라나...




산책로에서 바라본 송정 바다, 각각 다른 지점에서 찍었는데 나란히 놓으니 마치 한 장소인 것처럼 그림이 이어진다




아파트 현관을 나와 바다로 가는 길에 내리쬐는 햇볕이 무척 따사로웠다.

바닷바람을 걱정하면서 걸치고 나온 겨울 외투가 살짝 부담스러워지려고 할 만큼 갑자기 따뜻해진 세상에 당황하긴 했지만 정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조금씩 몸이 더워지는 것 같아 목에 두른 스카프를 벗었더니 이제 찬 기운이 가시고 선선해진 바람이 기분 좋게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요 며칠 참 많이 바빴는데... 모처럼 바다와 바람과 하늘을 마주하니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모든 생각들이 사라져 마음이 가지런히 정돈되고 오늘이 마치 수고로이 일한 나에게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특별한 선물 같았다.

이럴 땐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감사하게 여겨지는 법...


문득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누군가 나와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졌다.




"여보, 고마워요."

"뭐가?"

"나랑 같이 걸어줘서요."

"아~ 네."

"당신도 나한테 고마운 거 말해봐요."

엎드려 절 받기라도 대답만큼은 솔직하게 하니까 정공법으로...


"고마운 거? 음... 나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뭘 기다렸지? 아~ 아까 준비할 때 내가 현관에서 기다린 거~ 맞다"





산책로를 지나다 만나는 해안열차와 스카이 캡슐




소소한 감사를 함께 나누면서 걷다가 불현듯

부부란 그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걸어주고, 기다려 주고...


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우리의 지난 25년이지만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언제나 내 곁에서 한결같이 함께 걸어준 남편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내가 힘들 때,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어 주저앉아 있을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를 기다려준 남편이 있어

다시 함께 걸을 수 있었다.

남들이 알아줄 리 없는 선교단체 사역자의 삶은 때때로 버겁고, 외롭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사명을 따라 살아온 이 길이 마냥 힘들게만 남아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나는 항상 한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마음 맞는 길동무가 옆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오늘 남편을 향해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요."라는 감사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다.



저렇게 앞서가다 기척이 멀어졌다 싶으면 돌아서서 기다려준다.



송정에서 해운대까지 1시간 걷기...

불과 한 달 전에 거뜬히 완주한 이 길이 오늘은 웬일인지 쉽지 않았다.

가다 서다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운동 부족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나와 같이 나온 것이 아니면 자기 페이스대로 제대로 운동 되게 걸을 이 길을

남편도 덕분에 가다 서다를 계속했다.

앞서 가다가 뒤따라 오는 기척이 없으면 돌아서서 어기적 거리며 걸어오는 나를 기다려 주고

그리고 내가 바로 옆에 다다르면 다시 보조를 맞춰 걸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함께 걸으면서

샛길이라도 있으면 그냥 도망가고 싶다 했던 그 길을 오늘도 나는 끝까지 갈 수 있었다.



탁 트인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의 끝에 다다르면 언제나 주어지는 보상이 있다.

바로 완주의 기쁨이다.

뿌듯함, 성취감, 대견함 등 수많은 감정들로 나를 토닥여 주는 지점도 바로 그곳이다.

나를 향해 열렬한 응원을 보내며 춤을 추는 듯한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면서

'나오길 참 잘했어, 힘들지만 잘 걸었네' 나에게 엄지 척을 날려주었다.

그리고 남편과 스*벅*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딸기라테로 완주를 함께 축하하며 오늘의 해안로 산책을 마무리했다.


오늘도 함께 걸어주는 남편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길에 함께 걸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감사한 일이다.

부부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감사하다 말해주고 귀하게 여기며 앞으로를 살아가야겠다.



"오늘 함께 걸어주어서 고맙습니다.“


(ps. 그리고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현관에서… 기꺼이…)



산책로를 따라 1시간을 걸어 해운대 입구에 도착, 멀리 부산의 랜드마크 광안대교가 보인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해운대 #송정해안산책로 #부부 #동행 #함께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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