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 버려졌다는 감각

내 존재의 낮은 울림

by 강훈

##밀크캬라멜 한 통.

100원짜리 작은 캬라멜 통 안에는 일곱 개의 캬라멜이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그중 하나를 꺼내 정확히 반으로 잘라 나와 여동생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게 우리의 하루 간식이었고, 그 한 통이면 일주일이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달콤했던 시간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각자 한 통씩을 사주신 것이다. 여덟 살의 나는 믿기지 않는 행운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온전히 내 것인 캬라멜 한 통. 일곱 개 모두를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사라지셨다.

그 캬라멜 한 통이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걸, 작별 인사였다는 걸,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 후로 나는 밀크캬라멜을 먹지 않는다. 아니, 먹을 수 없다. 그 달콤함 속에는 버림받은 기억의 쓴맛이 영원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낮은 울림의 시작

"내가 얼마나 별것 아니고 쓸모없었으면 버렸을까?"

이 질문은 여덟 살 소년의 가슴속에서 시작되어 평생을 따라다니는 낮은 울림이 되었다. 마치 깊은 동굴 속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소리처럼, 나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해도 이 울림을 들어야 했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는 새어머니들로 채워졌다. 정확히 열 명. 어떤 이는 몇 달, 어떤 이는 몇 년을 머물다 갔다. 나보다 겨우 아홉 살 많은 스물두 살의 새어머니도 있었다. 내가 열세 살, 아버지가 마흔이었을 때였다. 그녀는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폭력과 외도를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새어머니가 바뀔 때마다 나는 더 작아졌다. 아버지는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여자가 우리 집에 있었고, 나는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엔 상처받았지만, 나중엔 무덤덤해졌다. '아, 또 누군가 왔구나.' 그뿐이었다.


##폭력이라는 일상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아버지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왔다.

"자식 같은 거 필요 없어. 돈만 들어가는 것들!"

할머니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말리는 사이, 나와 여동생은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차가운 눈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들었지만 그런 건 느낄 겨를도 없었다. 살기 위해,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아니, 어쩌면 더 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발이 시린 것보다 가슴이 더 시렸던 그날. "내가 얼마나 가치가 없으면 죽이려고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눈밭을 달리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의 폭력은 훈육이 아니었다. 각목과 허리띠가 무기가 되었고, 때로는 그 허리띠가 내 목을 조르기도 했다. 한겨울에 옷을 벗겨 밖에 세워놓고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내가 맞을 만한 존재구나.'


##수치심이라는 이름의 동반자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을 "단절에 대한 공포"라고 정의한다. 더 정확히는 "나에 대한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거나 보게 될 때, 나와 관계를 맺을 가치가 없다고 느낄 것이라는 두려움"이라고 설명한다.

열한 살 때의 일이다. 잠들어 있던 내 옆에서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성관계를 했다. 중간에 잠에서 깬 나는 그 순간을 목격해야 했다. 그 트라우마는 단순히 충격적인 장면을 본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그 정도로 투명한 존재'라는 메시지였다. 마치 내가 거기 없는 것처럼, 아니 있어도 상관없는 존재인 것처럼.

가난도 수치심을 키웠다. 쌀집 주인아저씨가 우리 집에 찾아올 때마다 나는 숨고 싶었다. 외상값을 받으러 온 그의 발걸음 소리는 내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쌀이 떨어지면 외상으로 산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별미로서의 수제비가 아니라, 소금만 넣은 맹물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은 생존을 위한 수제비였다.

"나는 충분히 ___ 하지 않아."

브레네 브라운이 말하는 이 수치심의 주문은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스며들었다.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아서 버려졌고, 충분히 가치 있지 않아서 맞았으며, 충분히 중요하지 않아서 무시당했다.


##열등감, 그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아픔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누구나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 자신도 형제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안고 성장했다고 한다. 아들러에 따르면, 열등감은 우리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낮은 것을 높이며, 미완성의 것을 완성하려는 '우월성 추구'로 나타나는 선천적 경향성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극심한 박탈감과 폭력, 부모의 양육 태만은 이 건강한 메커니즘을 왜곡시킨다. 아들러 학파는 가족 구도와 부모의 양육 태도가 한 사람의 '생활양식(life style)' 형성에 결정적이라고 본다.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양육 태만'은 자녀에게 깊은 열등감 콤플렉스를 심어준다.

내 경우가 그랬다. 나는 단순히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잘못됐다'고 믿게 되었다. 이는 애착 이론에서 말하는 '내면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의 왜곡이다. 아이는 초기 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과 세상에 대한 기본 틀을 만든다. 안정적인 애착은 '나는 사랑받을 만하고, 세상은 안전하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그러나 나의 내면 작동 모델은 정반대였다. '나는 버려질 만하고, 세상은 위험하다.' 이 왜곡된 렌즈로 나는 모든 것을 해석했다. 타인의 친절은 의심스러웠고, 작은 거절도 큰 상처가 되었다.


##자기 연민이라는 시작점

대학 등록금 에피소드는 이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새어머니 중 한 분이 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는데, 아버지는 그 돈을 가로챘다. 나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자식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아버지.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구나.'

입학부터 졸업까지 13년.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했던 대학 시절은 고통스러웠지만, 역설적으로 나를 일으켜 세운 시간이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자존감 회복의 첫걸음으로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 위로가 아니다.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에 따르면, 자기 연민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친절하기. 둘째, 자신의 경험을 고립된 것이 아닌 보편적 인간 경험의 일부로 인식하기. 셋째, 고통스러운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균형 잡힌 알아차림 속에서 바라보기.

"상처도 너야."

훗날 내가 도달한 이 깨달음은 바로 이 자기 연민에서 시작되었다. 버려졌다는 감각, 그 낮은 울림을 없애려고 애쓰는 대신, 그것도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첫걸음이었다.

밀크캬라멜을 다시 먹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달콤함을 피하는 것도, 그 쓴맛을 기억하는 것도 모두 내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을 하는 나 자신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낮은 울림은 여전히 들린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심장 박동 소리처럼 느껴진다. 상처받았지만 살아남았고, 버려졌지만 여기 있으며, 부족하지만 충분한 나.

그 모든 모순을 품고 사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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