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ire.
운전대를 잡은 손에 아직 로프 자국이 남아 있다.
혜천은 조금 전의 소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의 무심한 성품이 장점이 될 때도 있다.
학생들이 남기고 간 테라칸 뒷좌석에는 식료품과 생필품이 가득 실려 있다.
그리고 길에는 여전히 쥐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는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공화국에서 부여받은 신분의 가족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밀정이다.
나는 10년 전 남파했다.
남쪽 신분세탁업자에게 건네받은 파일에는 일류 대학 출신 박동훈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업자는 연고자, 출신성분, 신체조건 등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여 선정한 맞춤형 신분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상부의 지시대로 이른바 '설거지' 작전을 감행했다. 실제 박동훈을 살해하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깊이 파묻었다.
그날 일에 대해서 아직도 까닭을 알 수 없다.
왜 그런 일은 꼭 비가 오는 날에 해야 하는 건지, 생각만 해도 짜증스럽다.
혜천은 무려 50년 차 밀정이다.
그리고 50년째 ‘오랑캐’ 발령 상태다(나는 오랑캐 10년 차).
작전명 ‘오랑캐’는 대기발령 체제를 말한다. 그러니까 몸을 숨기고 다음 지령을 기다리라는 암호다.
10년 전 환갑이 넘은 혜천에게 나와 접선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이후 다시 ‘오랑캐’ 상태다.
공화국의 사명을 받고 내려온 지 어언 10년이다. 여태껏 아무런 지시가 없다.
이 썩어빠질 조국에서 007의 환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식대도 안 준다.
공화국에 계신 어머니께서 이 거렁뱅이 꼴을 하고 있는 막내아들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부디 알지 마소서).
우리에게 뚜렷한 지시나 지원 한번 없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권력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북쪽의 체제를 여러 번 탈바꿈시켰다.
그 과정에서 새로 부임한 관료들이 전임자의 업적 지우기와 되살리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우리 파일은 잊혔고 버림받았다.
혜천. 그가 견뎌온 고생은 말할 것도 없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얼마나 단련되었을까.
우리는 당 고위층의 트로피나 마찬가지다.
당 간부들은 물갈이되는 시점에 업적 세우기에 급급하고 만만한 게 남파 간첩을 보내는 것이다. 일종의 관례이자 두둑한 퇴직금 보장 루트다. 그런 관행도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였지만, 나는 운 나쁘게도 막차를 타고 말았다.
남파에 성공하면 자신들은 훈장 하나 달고, 우리는 이 거지꼴로 ‘오랑캐’를 하게 된다.
거기다 이제는 우리에게 신호도 없이 장사정포를 갈기고 있다.
‘개 같은 놈들’
너무도 굴욕적이고 분한 일이다.
우리는 이름 모를 저수지의 물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혜천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66식 토카레프 권총과 다 떨어진 난수표를 물에 던졌다.
나도 연락소와 교신할 때 사용하는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물에 던졌다.
고개를 돌려 노인네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우는 모습도 못 봐줄 만큼 추하게 일그러져 있다.
‘개 같은 놈들’
어쨌든 우리는 살아있다. 그리고 다시 테라칸 좌석에 앉았다.
대시보드 전자시계는 6시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창밖에 세상은 벌써 한밤중이었다.
아, 그리고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깜빡하고 얘기를 안 했다.
죽였냐고?
“쌍간나 새끼들 내래 근무시간 지났다우!”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