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진철은 졸지에 선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든 대충 모면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민에게 묘한 호감을 느꼈다.
수민은 언뜻 봐도 고급스러운 투피스 정장 바지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이라도 하듯 약간 발칙한 말투도 진철의 마음을 흔들었다. 순종적인 영미와는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둘은 막힘없이 대화했다. 주제도 다양했다.
수민은 진철의 업무 영역을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의 상황과 전망도 훤했다.
수민이야 진철의 가족 사항을 사전에 숙지하고 있었다.
진철은 실제 자신의 이력서를 열람했을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다.
자신도 보좌하는 사장의 딸이라는 점에서 거의 모든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다.
둘은 사적인 부분만 은근슬쩍 피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는 자연스럽게 2차까지 이어졌다. 근처 커피숍으로 이동해서는 좀 더 깊은 대화로 이어졌다. 둘은 그날 이후로도 종종 자리를 가졌다. 주로 진철이 저녁 식사를 청했다. 수민은 매번 선뜻 승낙했다.
진철은 수민과의 시간이 즐거웠다. 그렇다고 영미와의 관계가 소원했던 것도 아니다. 영미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조강지처였다면 수민은 애인 같은 느낌이었다(실제로 애인이기도 했다).
연애 초반에 느껴지는 특유의 설레는 감정도 진철을 자극했다.
수민은 대범했고, 영미는 소심했다. 진철은 그럭저럭 둘과의 관계를 영리하게 잘 이어가던 무렵이었다.
오 사장이 수민과 진철을 불렀다. 장소는 세 사람이 처음 만난 일식집 다이스케다.
오 사장은 기업가답게 추진력 넘치는 면모를 보였다. 그 자리에서 둘의 장래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싶어 했다.
진철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수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고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오 사장은 너털웃음을 보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두 사람만 좋으면 시간 끌 것 뭐 있겠냐며 당장 다음 달에 결혼식을 올리라고 권했다.
진철은 수민의 반응을 확인했다.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이 사실을 영미에게 전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당분간 사우디로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노라고 사기를 쳤다.
진철의 죄책감이 커질수록 생활비도 비례해 올라갔다. 영미는 생활비가 넉넉해졌지만, 딱히 쓸 곳도 없었다.
한편 진철의 신혼살림은 수민의 본가에 마련된 별채에 꾸렸다.
오 사장의 저택 안이었지만, 독채로 떨어져 있었다. 외부로 독립된 출입문도 있어서 사실상 분가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1년이 흘렀고 수민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딱히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고를 쳤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둘은 서로 사랑했고 부부였다. 모든 게 때가 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오 사장의 집으로서는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진철은 여전히 영미도 사랑했다. 그 무렵 영미는 진철의 권유로 포항의 외딴 마을로 살림을 옮겼다.
늘 안색이 좋지 않고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휴양하기를 권유했다. 속내는 서울에서 이격 시켜 놓는 것이었다.
진철은 영미가 임신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이 해외 출장으로 장기간 집을 비운 사이, 영미가 아이를 유산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영미는 바쁜 진철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 모든 사실을 함구했다.
어쨌든 영미는 한반도 지도의 토끼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유배 아니, 이사를 했다.
진철의 결혼 생활도 이제 5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오 사장의 가문으로 입성하고 예닐곱 배는 바빠졌다. 따라서 더는 두 집 살림을 이어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진철은 더 이상 도덕을 논할 수도 없는 만큼 타락해 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미에게 사실을 고백하기로 했다.
진철은 순종적이고 마음 여린 영미에게 양보를 기대하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다만, 진심으로 수민을 사랑했고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제외했다. 굳이 다 알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폭군이나 다름없는 오 사장이 자신을 높이 평가해서 여식인 수민과 강제로 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은 극구 반발했다. 당연한 결과로 오 사장은 격분했다.
진철에게 모든 커리어를 포기하고 평생 골방에 쭈그려 앉아 살 것인지 수민과 결혼을 선택할 것인지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오 사장의 집요한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한창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단지 오 사장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만으로 잘 다니던 직장에 잘리고 업계에서 매장될 판이었다'라며 주장했다.
오 사장의 영향력이 광범위해 자신을 블랙리스트에 등재하면 평생 취업 길은 막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막노동판까지 사람을 붙여 따라다니게 하면서 훼방 놓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어떻든 자신은 나름대로 최적의 수를 따져보았다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유한하듯 오 사장도 임기가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고려했다면서, 따지고 보면 그도 한창 젊은 CEO 지만 최근 몇 년간 실적 부진과 경쟁사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형세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위장 결혼을 하여 오 사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경영진으로 승진을 하면 결국 우리(영미와 진철)가 잘 살게 되는 지름길 아니냐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쯤이면 오 사장은 경질되고 자신도 어엿한 중역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때 당당히 이혼을 하더라도 오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사랑하는 건 영미가 유일하다. 수민과는 쇼윈도우 부부일 뿐이다. 그녀도 폭군 같은 아버지를 둔 덕에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둘은 손도 잡은 적 없으며 수민은 수민대로 사랑하는 남자가 따로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진작 말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질질 끌어왔던 자신을 용서해달라며 무릎을 꿇었다.
영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오빠, 정말 힘들었겠다."
영미는 관용을 베풀어 진철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진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영미는 진철의 사정을 파악하고 이미 아사 직전의 상태와 다름없는 자신의 처지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의 기록에서 자신이 사라져야만 할 것 같았다. 진철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때가 되면 진철과 떳떳하게 결혼을 할 것이라는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사안을 두고 일심동체가 되었다. 영미는 도망치듯 포항에서도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터를 잡았다.
진철은 알리바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영미에게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영미는 은둔자가 되어 지내며 진철이 자신을 버리는 망상에 시달렸다. 한편으로 따지고 보면 같은 서울에 있어도 거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고속철도가 개통되기 전의 시대는 진철이 헬기라도 타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의 거리는 좁히기 어려웠다.
반면 진철은 최고의 골칫거리였던 영미 문제가 해결되어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너무도 평화롭고 안락한 나날이 이어졌다. 수민은 여전히 소통 잘 되는 아내였고,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아이의 출산도 앞두고 있었다.
진철의 삶에 영미의 지분은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한 달에 한 번 방문이 석 달로 간격이 늘어났다. 그마저도 아이가 태어나고서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그저 돈만 넉넉히 붙여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영미는 병들어갔다. 하루가 다르게 체중을 잃어 급기야 중환자의 외형으로 변해 갔다.
어촌마을에 마음씨 좋은 이웃들이 영미 집을 들락거리며 건사하다시피했다. 가끔 보이던 남편은 언제 오냐며 물었지만, 진철에게 누가 될까. 남편은 사우디에 돈을 벌러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어 다른 가족의 소재지를 묻는 말에 자신은 가족이 없다고 일축했다.
"쓰벌놈들."
옆집에 사는 노파가 영미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리며 말했다.
영미는 자신의 처지에 지치다 못해 돌아버릴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정말로 돌아버렸다. 정신착란 증세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리고 그 증세는 맹렬한 분노로 바뀌었다.
판단력을 잃은 영미는 어느 날 짐가방을 들고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진철의 주소는 알지 못했다. 다만, 미래산업 사옥의 위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미는 미래산업 사옥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도 못했다. 그녀의 꼴을 본 경비원에게 제지당했기 때문이다.
"제가 신진철 전무 아내라구요!"
경비원은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원."
영미의 우악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건강 악화로 기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였다. 더불어 서울까지 장거리 여행에 시달려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진철이 생활비는 넉넉히 보냈던 터라 영미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행선지를 정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차를 타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영미는 이 거지 같은 미래산업 사옥 앞에서 한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택시 기사는 수다스러웠다. 자신은 본래 타짜인데 부업으로 택시 운전을 겸업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어 서란다. 영미는 사회봉사와 택시 운전과의 상관관계를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한참을 4차선 대로를 달리다가 문득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모실까요?"
영미는 몇 초 정도 고민했다. 문득 배가 고프다는 걸 느꼈다. 한때 진철과 즐겨 찾던 이태원의 설렁탕집이 생각났다.
"이태원으로 가주세요."
"예이, 모시겠습니다."
택시 기사의 내시 같은 대답을 듣고 참으로 독특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았다. 영미는 순간 길을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아저씨, 이 길 아닌데요?"
"엥? 아닌데? 아가씨 걱정 마시라니까요. 여기로 가는 게 훨씬 빠르걸랑요."
영미는 이 꼬불꼬불한 길이 어떻게 이태원으로 이어진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와 말다툼을 할 기분도 아니었다.
달리 갈 곳도 없는 마당에 돈도 넉넉히 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이어질지 잠자코 있어 보기로 했다.
굽은 길을 벗어나서 정말로 한남동의 깨끗한 주택가가 나타났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거 보십쇼. 이 길은 저만 아는 길이라니까요."
영미는 대꾸 없이 담벼락이 높은 집을 구경했다.
"저기 저 집 보이시죠?"
큰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미래산업 사장님 댁이랍니다. 정말 대단해 저런 집은 대체 얼마나 할까?"
"저 여기서 내려주세요."
"네? 이태원 가신담서요?"
"여기서 볼일이 생겼어요. 잔돈은 안 주셔도 돼요."
만 원권 지폐를 내밀며 말했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