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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May 16. 2023

사랑은 원래 고독한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겠지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봄, 이소라>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봄, 이소라>


좋아하는 영화가 뭐에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취미 삼아 영화 보는 것을 즐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 것은 괴롭힘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14개 쯤 있거든? 네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으로 골라주려면 고민할 시간이 조금 필요해. 라고 말해주고 싶다.


최애 영화가 <이터널 선샤인>이라고 말하자, 몇 명이 '무슨 취향인지 알겠네'라고 다. 그리고 추천해준 영화는 하나 같이 별로였다. <500일의 썸머>는 누가 인생 영화래서 봤는데 개인적으로 실망스러웠다. <건축학개론>도 그렇지만, 조금도 쌍방의 감정이 일치하지 않는 서사는 끌리지 않는 것 같다. 시점을 섞는 구성은 독특했지만, 각 장면의 연출이 튀었던 것이 몰입을 방해했다. 메세지는 인상 깊었다. 다만 표현이 다소 직관적인 게 아닌가 싶었다. '여름 지나면 가을'이라는 메세지를 주려고, '써머' 다음에 '어텀'을 등장시키다니. 무엇보다 주인공이 요즘 유행어로 '하남자' 아니던가. 찌질한 남자의 사랑에서도 비장미가 느껴질 수 있다. 다만 이기적인 사랑이라면 논외다.


좋아하는 영화가 <아가씨>라고 말한 뒤 추천받은 영화는 하나 같이 괜찮았다. 가장 근래에 본 <가장 따듯한 색 블루>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다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감상을 권하고 싶다. 사랑은 착취가 아니라 교차하는 시선이며, 대상화가 아닌 존엄한 주체 간의 연대라고 말하는 영화다.


타오르는 예술과 저항의 이미지가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예술은 흐르는 시간 탓에 명멸하는 아름다움을 박제한다. 주체성을 실현하고 꿈 속 이상향을 구현한다. 돌아보는 순간 사라지고, 찰나에 그칠 지언정,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은 원치 않음으로 가득한 삶을 구원한다. 인생은 비극의 환원이지만, 영화는 꿈 꾼다면 돌아올 아름다움과 주체성.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성에 대해 말한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멀리 떨어져 연주를 감상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율을 참을 수 없었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


왜 블루는 가장 따듯한 색인가


<가장 따듯한, 블루> 이야기로 돌아오자. <가장 따듯한 색, 블루>LGBT 커플의 특수함이 아니라 모든 사랑이 초래하는 평범한 슬픔에 대한 영화다.  점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서사이기도 하다.

영화의 구성은 미리 예고되어 있다. 초반에 나오는 학교에서의 문학 수업 내용이 영화의 전개를 암시한다. 수업의 내용처럼 이 영화도 짧은 마주침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형태가 무엇이든 사랑의 줄거리는 다 비슷하다.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아델이 엠마를 마주치고, 이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서로의 공통점에 주목한 뒤 차이점에 빠져든다. 뻔한 권태를 겪고, 헤어진 밤엔 울기도 한다. 이제 아델은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델은 그 짧은 조우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평소처럼 유치원 일을 마치고,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자마자 울음을 터트린다. 유난 같지만, 세상이 전부 푸르게 물든 시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은 다른 가족이 긴 엠마의 등지고 어딘가로 걸어간다. 아델은 엠마를 잊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인간의 뇌는 한 번 겪은 일을 절대 지우지 않는댔다. 잊었다고 믿는 많은 기억들은 어디엔가 몰려있는 것이고, 그 농도 짙은 기억들은 아델의 삶에도 어느 순간 찾아올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글을 빌리자면,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속성도 원래 푸른 것이고, 그래서 블루는 가장 따듯한 색이다.


어른이 되어보니 나는 꿈 속에서도 기적을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대신 기적을 행해주는 누군가를 믿어보려 했지만, 사람들은 근래 들어 신이 죽었다고 말한다. 니체가 아니고, 자본주의가 신을 죽였다. 전능한 것은 세속의 성공과 건강처럼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자꾸만 도태되고 우울해지는 사람들이 생긴다. 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구원의 순간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 기적을 경험해본 사람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첫사랑의 상대는 언제든 나를 구원하고 벌할 수 있는 영적 체험을 제공한다. 그 보편적 고통의 경험을 따듯한 푸른 색감으로 담아낸 영화가 <가장 따듯한 색 블루>다.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 없다면 상실은 필연적인 것이다. 슬픔은 자연스럽다.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런 슬픔마저 숨기는 것이 자본주의다. 짓눌린 감정은 응축되어 있다가 반드시 돌아온다. 우리는 슬픔을 직시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깊은 슬픔을 경험해본다면, 세상은 타인의 비극에 조금 더 사려 깊어질 것이다. 나 대신 충분히 슬퍼해주는 영화라는 점에 <가장 따듯한 색 블루>의 따듯함이 있다.

의아한 점도 있었다. <아가씨>를 보면서 들었던 의문이기도 하다. 대중성을 갖춘 많은 퀴어 영화가 과할 정도로 배드신 묘사에 공을 들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장면들은 여성 캐릭터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치인 동시에 남성 판타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성애자의 사랑을 떠올릴 땐 낭만적인 경을 그리지만, 성소수자의 사랑에서는 성적인 관계만을 떠올리는 것도 편견이다. 다만 페미니즘은 다양한 관점이 교차하는 사상이며, 포르노 자체가 악한 콘텐츠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오로지 남성의 욕망만이 반영된 포르노가 문제라는 이다.


무엇이 적절한 관점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가치는 우리에게 아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아델이 겪었던 '블루'가 언젠가의 내 같았음을 깨닫는 순간, 모든 형태의 사랑을 포용하는 세상도 조금은 다가온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삶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랑을 포기한 삶은 차가운 세계에 대한 항복이기에 모든 사랑은 환대받을만 하다. 그 사랑이 본질적으로는 푸른 이라도 말이다.


우리가 함께 달라지고 있다는 것.


눈썹달, 이소라


사랑은 비극이라고 말하며 충실히 슬퍼하는 유명한 가수의 노래가 있다. 이소라의 명반 <눈썹달>에 수록된 '봄'과 '바람이 분다'는 담담하게 고통을 풀어낸다. 사랑을 겪고나면, 세상이 온통 푸르게 보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우리의 관계는 달라져 있기에 비극이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달라져 있다'는 사실이 참담할 때가 있다.


덜 사랑하는 너와, 더 사랑하는 내가 공존한다는 모순이 많은 관계를 비극으로 이끈다. 동시에 사랑한다는 말을 뱉어도 그 깊이와 의미는 서로 다르다. 연인이 '한 쌍'이라는 은 결국 그들이 두 명의 타인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둘은 다른 사람이다. '그대는 내가 아니라 추억은 다르게 적히'고, 그래서 사랑은 비극이다. 여기까지가 잘 알려진 '바람이 분다'의 노랫말이다. 앨범 뒷부분에 실린 곡 '봄'에서는 이 정서를 한층 깊이 승화한다. '다만 다행인 것은 당신도 한살을 먹는다는 것.' 삶은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당신은 반복되지 않아서 슬픈지 모른다. 시간이 흐를 것이다. 우주의 법칙 아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찾아오는 위안이 있다. 서로를 똑같이 관통해 시간이 흐른다는 것, 우리가 같은 '눈썹달' 아래 똑같이 늙어갈 것임이 위안이다.


읊조리며 노래할 때 이소라는 최고의 연기자이기도 하다. 같은 앨범의 마지막 수록곡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 "나만 사랑하는 거 같잖아"라고 할 때, 훌륭한 영화를 본 것 같은 전율을 느낀다. 이소라의 가사는 멋부리지 않는다. 이소라의 가창이 담백한 것과 마찬가지다. 표현되지 않는 슬픔은 슬픔의 본질과 닮았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세상이 파랗지만, 표현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처럼.



<봄. 이소라>

하루종일 그대
생각뿐입니다
그래도 그리운 날은
꿈에서 보입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모르는지
미련도 없이 너무 쉽게
쉽게 헤어집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오면
원망도 깊어져가요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또 기다릴 수 있겠죠


그대와 나 사이
눈물로 흐르는 강
그대는 아득하게
멀게만 보입니다


올해가 지나면
한살이 또 느네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대도 그렇네요


(..)


그리 쉽게
잊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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