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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May 26. 2023

'진짜 삶'은 언제 시작되는가

"시간을 아낄수록 점점 가진 것이 줄어들었다."

<가사문학에 흐를 때>

1-'모모' /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 안녕하신가영'


군대에서도 자기계발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뒤처지는 것이 무서웠다. 낮에는 정신없이 일을 했고, 짧은 휴식 시간엔 체력을 비축하려 치열하게 누워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토익 책을 째려보다가 잠을 청했다. 간부 목욕탕 너머의 언덕에 낙엽이 예쁘게 진 것도 몰랐다.


현대 문명은 우리에게 시간을 아끼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점점 바빠지고 날카로워졌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시간을 아낀다고 믿을수록 우리는 인정을 잃어가고 누리는 것이 줄어들었다. 

약속에 10분씩 늦는 '코리안 타임'이 생긴 이유는 한국이 농경사회였기 때문이다. 영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처음에는 비슷했다. 산업화 이전 사람들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해가 떴으며 계절이 바뀌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시침으로, 분침으로, 초침으로 쪼개놓은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기획이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 시계는 시간이 거짓말이라는 증거인 것을.' (체념, 심보선) 그래서 시계의 역사는 인간 착취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시간을 초 단위로 지키며 아둥바둥 사는 건 언제나 노예의 몫이였다.


누군가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간이 남아 돈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정시에 출근하고 시간을 엄수하며 일할수록, 누군가는 일하지 않아도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계절의 순환 속에 삶을 영위했다. 일해야 할 때 일을 했고, 남는 시간에는 쉬었다. 인간은 원래 비효율적이다. 효율을 잣대로 삶을 살아간다면 여행도, 사랑도, 음악도 모두 저질러선 안될 끔찍한 시간낭비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삶의 본질이다.


미하엘 엔데의 고전 명작 <모모>에서 악역은 시간을 아끼며 열심히 살 것을 권장하는 '회색신사'다. '회색신사'들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그들의 시간을 훔치고, 주인공은 그들이 가져간 시간을 되찾아 사람들에게 돌려준다.

<모모>의 시간도둑들은 '시간을 아낀다'는 환상을 주입해 자기착취를 부추긴다. 김누리 교수의 지적이 떠오른다. 그는

현대사회에서는 모두가 '마음 속에 노예감독관'을 데리고 산다고 했다.

쉬려고 할 때마다 노예 감독관이 나타난다. "남들이 노력할 때 너는 왜 쉬는가." "왜 시간을 낭비하는가." 사람들은 노예감독관의 추궁에 굴복해 자기 삶을 착취하곤 뿌듯해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갓생'을 살았다며 말이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삶은 자연, 사람, 예술, 철학과 관계 맺으며 시작된다. 삶을 모르는 '엄친아'들은 대부분 소시민적 경험이나 인문적 소양 없이 책상머리에서 익힌 생각들로 공분을 일으킨다. 행복을 모른 채 어른이 되었기에 타인의 행복을 배려할 줄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이곳의 별명은 '헬조선'이다.

우리가 아둥바둥 아낀 시간은 다 누가 가져갔는가. 사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고 있는 게 아니라 시스템에 빼앗기고 있다. 시간이 금이라고 떠드한국 사회에 대한 모모의 반박은 이렇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낄수록 점점 가진 것이 줄어들었다."





비슷한 문제 의식을 가진 노래가 있다. '좋아서 하는 밴드'의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이라는 곡이다. 이 노래의 작사와 가창은 '안녕하신가영'이 맡았는데, 그녀의 다른 노랫말이 그렇듯 담백한 가사가 아름답다.


시계가 없는 세상의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이렇게 한다. '내일 아침 해가 저기 저 언덕 위에 걸쳐지면, 그때 만나자.' 상대가 조금 늦어도, 바쁜 일상으로 돌아갈 걱정에 시계를 보며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참 낭만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10분이 늦어 이별도 하는데.


우리가 사는 곳에는 숫자도, 시계도 너무 많다. 우리는 자주 비틀대고,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 이곳에는 시간을 아끼고 열심히 일하며 살겠다는 게 목표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다들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그런데 다들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비명소리 같은 지하철의 소음을 견디고 사람들 틈에 다닥다닥 끼어 출근하는 당신의 아침은 얼마나 행복했는가. 21세기 서울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래도 회색신사들에게  것 같다.


<모모>의 주인공은 회색 신사들을 모두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돌려준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빨리 시간을 저축하겠다는 환상에서 깨어난다. 조용하고, 느리고, 편안하고, 느긋한 삶이 돌아온다. 자연은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니라 공존하는 즐거움이 되고, 아이들은 대화와 놀이로 관계를 학습한다. 삶은 그렇게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는 '생의 고통은 피하고 쾌락만을 누리자'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인생의 목적은 행복과 쾌락이다. 결국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그렇게 설계되었다. 지금 행복해야 한다. '안녕하신가영'의 다른 곡 <지금이 우리의 전부>가 노래하듯 말이다.


다만 현대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을 살지 못하게 방해한다. 지금 희생하면 미래의 어느 순간 행복해질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 바쁘고 정신없는, 피곤하고 걱정 가득한 나날이 이어질 뿐이다.


모두가 쳇바퀴를 도는 가운데 이득을 보는 것은 '사람' 하나하나가 아닌 '사회 구조' 그 자체, 그리고 그 구조의 소수 기득권 뿐이다. 행복한 하루가 모여 행복한 인생이 된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하는 수험생은, 인간관계에 골머리 앓는 직장인은 과연 오늘 행복한 하루를 보냈는가. 구조의 거짓말을 이겨낸 사람, '지금 행복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다.


다만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장한 '쾌락'은 육체적 향락 같은 것이 아니다. 짧은 향락은 긴 고통과 상실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편안함이 이어지는 것, 그래서 '지금'을 즐기고 만족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우리의 걱정 중 대부분은 오지 않을 걱정이거나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들이라고 한다.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불행히 보내는 사람은 어리석다. 짧은 우리의 인생에 불행한 오늘을 적립하는 대신, '지금' 내게 주어진 맛있는 식사를, 내 곁의 가족과 연인을, 그리고 이 짧은 가을을 길게 즐기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회색신사들을 마주치면 말해줄 것이다.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이지만, 현재를 팔아 미래를 살 수는 없다고. 지금이 우리의 전부라고.



<'10분이늦어이별하는세상' 가사 전문>


시계가 없는 세상의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이렇게 하지
내일 아침 해가
저기 저 언덕 위에 걸쳐지면
그 때 만나자
혹시나 네가 조금 늦어도
시계를 보지 않아도 돼
혹시나 네가 오지 않아도
내일 또 기다릴 수 있어서 좋겠다
숫자가 없는 세상의 사람들은
사랑을 할 때 이렇게 하지
언제부터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너를 좋아한다고
혹시 내가 널 더 사랑해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오래오래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대할 수 있어서 좋겠다
좋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10분이 늦어 이별도 하지
시계도 숫자도 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만나 사랑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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