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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혁 Jan 10. 2024

구름다리

12

25년 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놀이터에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기철은 홀로 남았다. 아이들이 없어서 흥미가 식을 만도 한데, 기철은 늦은 시간까지 놀이터를 떠나지 않았다. 기철은 매일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놀이터를 찾았다. 이곳에는 기철의 애착 놀이기구 있었기 때문이다. 기철은 아이들과 구름다리 철봉에 매달려 잡기 놀이를 하는 걸 좋아했는데, 손에 물집이 생기고 굳은살이 잡혀도 개의치 않 정도였다.

어느 날 구름다리 위를 걷는 아이를 보게 된 기철은 어린 마음에 신기했었는지, 자신 구름다리를 걷고 싶었던 것 같다. 기철은 놀이터에 홀로 남, 구름다리 위를 걷는 연습을 하곤 었는데, 떨어져 다칠 수도 있지만, 하고 싶다는 열망이 높은 곳에 대한 공포를 희석시킨 것 같다. 


구름다리 철봉 쪽으로 교복을 입은 중학생 형이 다가왔다.


"너는 집이 어디냐?"

"동이요"

"왜 남의 동네에 와서 놀아! 내려와."


갑작스러운 적계심을 이해할 수 없었던 기철은 겁먹은 표정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고, 중학생 형은 대답 대신에 구름다리 철봉에 매달려 기철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기철은 떨어질까 무서워 구름다리 철봉을 꼭 잡고 있었지만, 체격이 큰 형의 발길질에 손을 차이고, 발이 미끄러져 봉사이로 빠지며,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안 내려와? 이 새끼가!"


구름다리 위가 익숙하지 않았던 기철은 네발로 기다시피 구름다리를 내려왔고, 중학생 형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 확인한 기철이 문방구 앞에 멈춰 섰다. 기철은 오락기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 물거리는 캐릭터들이 재밌어 보여 웃음이 났는데, 누군가 기철을 불렀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서 술냄새를 맡은 기철은 덜컥 겁부터 났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다짜고짜 기철을 때리기 시작했고, 문 밖으로 나온 문방구 아줌마가 깜짝 놀라 말리는 사이에 기철은 아버지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밑에 앉아있던 기철 집안에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곤, 익숙하게 담장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 밖으로 아버지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안심이 된 기철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한쪽 구석에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했다.

기철은 엄마가 없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엄마를 잡아 오겠다고 술 먹을 때마다 이야기하곤 했는데, 엄마를 찾으러 간 날에는 술에 만취되어 들어와 집기를 때려 부수고, 울기까지 했다. 아버지 술 때문에 엄마가 도망갔을 거라고 이웃집 아줌마들이 수군거렸지만, 기철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신도 버림받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멀리 갈 거라며 영문도 모르는 기철의 손을 잡아끌었다. 뭐가 급했는지, 그녀기철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걸었고, 넘어져 무릎이 아팠던 기철 가기 싫다며 떼쓰기 시작뭔가 결심한 듯, 기철의 손을 놓았다. 잘 살라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기철에게서 멀어져 갔고, 비로소 기철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게 엄마를 찾았지만, 엄마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성인이 된 기철은 공사장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야! 꽁지야. 가서 막걸리 좀 사 와."


그들은 어리다는 의미로 기철을 꽁지라 불렀는데, 그들의 말이 부당하다 느껴도 기철은 토 달지 못했다. 대들기라도 하면, 대번에 재떨이와 주먹이 날아오기 일쑤였기에, 기철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술 때문에 폭행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살던 때 별반 차이가 없지만, 힘들게 일해야 먹고살 수 있으니, 지금 생활이 훨씬 고단했을 것이다.


[사는  힘들어. 내 인생은 더럽고 냄새나는 시궁창 같아. 삶이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이유를 모르겠어.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아?]


낮은 담장 너머로 사람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날카로운 분노를 손에 쥔 남자가, 목에 문신을 한 남자를 찔러 바닥에 쓰러뜨렸다. 기철은 너무 놀라 고개를 숙였으나, 호기심에 사로 잡힌 눈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흉기에 찔린 남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작은 새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러진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자, 흉기를 들고 있던 남자는 주위를 살피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봤던 기철이 손에 난 땀을 닦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의식이 있었는지 눈을 깜박거렸고, 숨이 붙어 있긴 했지만, 출혈이 심해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기철은 뭔가에 홀린 듯 손가락에 붉은 피를 묻혀, 냄새를 맡았다. 비릿한 피냄새가 두렵거나, 혐오스럽기보다는 어린 시절 구름다리 철봉 위를 걷는 듯한 희열이 느껴졌다. 기철은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시원한 감정에 사로잡 있었다. 자신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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