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3년

반짝반짝했던 나의 10대를 우울한 독일에서

by 돈시맘

3년의 침묵: 독일어에 대한 나의 반항


혹독한 신고식을 겪고 난 3년간 독일어를 거의 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어린 마음에 내 입에서 독일어 한마디가 나오는 자체가 끔찍한 행위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철없는 반항이었는지도. 독일어가 내 존재를 지워버리는 무기가 될 거 같았다.


큰 포부와 기대로 시작한 독일 생활. 그 기대만큼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실망과 무기력만 점점 더해졌다. 독어를 한마디도 못 하고 독일에 와서 단 6개월의 독일어 코스를 밟고 들어온 학교. 모든 게 낯설고 힘이 드는 이 상황에서 말도 못 하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정말 귀와 입이 막혀있는 이 답답함을 표현할 수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영어가 더 편했던 시절. 하지만, 독일에 왔으니 독일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우선순위는 독일어.


한국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이에 독어 그리고 영어까지 해야 하는 내 머리는 과부하가 걸릴 정도였다.


침묵의 시작: 독일어가 싫었다


학교 수업 중에도 하나도 못 알아듣고 눈칫밥 먹으면서 하루 종일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 곤욕 감.

같은 반 학생들에게서 느껴지는 나를 무시하는 눈빛. 그래도 숙제는 어떻게든 해서 갔었다. 읽고 쓰고 교과서의 문제를 푸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전을 찾으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기에 틀리던 이해를 제대로 못 했던 뭐라도 해가는 성의는 보였다.


하지만, 그 노력도 발표 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적응 안 되는 토론과 발표 수업. 한국과 다른 수업 방법도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한국어도 아닌 독일어로 반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를 벌거숭이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리고, 비웃던 그 독일 아이들. 내가 말 한마디만 해도 웅성거리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어수선해지는 수업 분위기. 꿋꿋이 내가 준비해 온 과제를 묵묵히 발표한다. 뜻이 맞는지 문맥적으로 자연스러운지도 모른 채 내 나름대로 노력해서 해온 발표 과제의 결과는 언제나 비참했다.

나는 그 교실에서 철저히 벙어리 외국이었다.


수업에서 발표를 안 하니 성적은 항상 중간 이상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과제를 잘 해와도 발표가 성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융통성 없었던 그 시대의 학교 시스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나름대로 노력은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넘을 수 있는 벽으로 인해 점점 내 수업 태도는 소심 해졌고 난 더 말이 없어졌다. 실패하면 할수록 수업 시간에 나는 점점 초라해지고 작아졌다.


나와 마주하는 또 다른 벽


학교 수업 후 이어지는 기숙사 생활. 수업 시간에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할 시간도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어지는 강도 높은 기숙사 생활. 아이들은 말을 너무나 빨리했으면 난 하나도 못 알아듣고 그러면 바보 취급을 받고. 다시 천천히 말해달라고 하면 검지 손가락을 머리 옆을 빙빙 돌리면서 제스처를 하면서 그냥 지나간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10대 소녀들에게 외국인을 위해 배려심을 강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독일어 싫다

우울하고 독일어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졌으니, 독일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차피, 못 하는 이 나라 말,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렇게 힘들게 마음고생을 받으면서 공부해야 하는지 회의감도 계속 들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귀가 열렸을 때도, 나는 침묵했다


1년이 조금 지난 후, 신기하게도 귀가 뚫린다고 해야 하나, 독일어가 귀에 들어왔다. 단어가 귀에 들어오고, 문장의 뜻이 이해되었다. 기뻐해야 하는데 기뻐할 틈도 없이 수업의 수준은 올라갔다.


1년이 지났음에도 입은 안 터지고 말 못 하는 외국인으로서 수업 자체를 포기한 것같이 앉아 있었다. 실패만 거듭하자, 정말 자포자기했었는지도. 말을 안 하니 당연히 말하기 실력은 안 늘고 아예 말을 안 했다. 대답은 언제나 단답형, 네, 아니요.


그렇게 3년이라는 생활을 독일에서 견뎠다. 말을 안 하니 생각이 전달이 안 되고 의사소통이 안 되니 점점 외톨이가 되었다.


침묵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하지만, 난 3년 동안 말을 못 한 게 아니라 일부러 안 했다. 독일어가 내 입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웠고 꼭 욕하는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도 나는 성장했고, 그 시간들은 내게 강인함과 회복력을 남겼다. 독일어에 대한 나의 저항감 이렇게 큰 줄은 나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난 아직도 독일어를 안 좋아한다.


어릴 적 독일어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독일어는 나에게 제2의 모국어이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슬픈 아픈 과거의 일부다.


나는 여전히 독일어를 완벽히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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