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롭게 백수생활하기!
11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다가 회의를 느껴서 백수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갑자기 주어진 나만의 시간. 그동안은 회사 일로 하루의 10시간 넘게 일을 하고 퇴근 후 주어진 짫은 시간 동안 육아하면 집안일을 했던 24시간. 24시간 중에 8-10시간은 오직 회사 일로 예약되었던 시간이 이제는 내 시간이 되었다.
내 하루의 절반을 회사 생활에 바쳐 정신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이라니. 처음에는 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할 계획을 세웠지만 열심히 뭔가에 쫓기던 삶을 살았던 나에게 주어진 이 감사한 자유시간을 처음부터 유용하게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회사를 안 나간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것처럼 느긋한 인간임을 포기하고 철저한 계획형 인간인 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회사 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을 짜고 to do 리스트를 작성했다. 회사를 그만뒀다고 해서 그동안의 습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출근을 안 하고 회사 일을 안 하니 고립이 된 느낌이었다.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주변에 없고 미팅도 없으니 하루 종일 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회에 소속되었단 느낌을 주었던 회사가 사라지고 나니 내 인생에서 회사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 변화
아침: 여유도 부려보고 아이에게 아침에 소리 지르는 행동도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등교, 출근 전쟁이라고 아침마다 아이의 등교는 내가 원하는 그림같이 그려지지 않는다. 언제나 큰소리와 아이의 울음으로 시끌 시끌 벅적 한 아침이 자연스러웠는데 내가 출근 스트레스가 우선 없어지니 아침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내 마음이 평안해지니 아이의 답답하고 느린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아이를 기다려 줄 수가 있었다. 내 하루의 일과였던 아침 전쟁이 사라지니 가족의 평화가 찾아왔다. 스트레스와 함께 시작했던 나의 하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후 여유로운 오후. 뭔가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시간이 많으니 그렇지도 않았다. 원래 하던 독서와 글쓰기를 계속했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점점 늘렸다. 내일 일찍 출근을 안 해도 되니 자는 시간도 들쑥날쑥. 기계같이 움직이던 나도 슬슬 인간(?)다워진다고 해야 하나?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루를 보낸다.
# 시간 활용의 오작동
집안일: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자꾸 집안의 더러움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청소하고, 정리하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백수 생활을 선택한 이유가 집 안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나? 일주일 정도는 깨끗한 집이 마음에 들고 좋았지만, 청소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려서 정작 하고 싶었던 일들은 시작도 못 하게 됐다. 청소하고 나면 항상 기진맥진해져서 소파에 앉아 핸드폰만 보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리곤 했다. 먼지가 굴러다니기 전까지는 집 안 구석구석의 더러움을 눈감아주기로 했다.
가족과의 시간: 그동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하루 종일 회사 일에 묻겨있다 보니 나를 위한 시간도 가족과의 시간도 언제나 없었다. 회사일을 안 하니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시작은 좋았다. 아이를 일찍 유치원에서 픽업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취지에 맞지 않게 아이와의 시간의 질이 점점 떨어졌다. 같이 보내는 시간은 많아졌지만, 그 비례에 맞게 같이 무언가를 함께 하는 시간은 늘어나지 않고 단지 아이가 집에서 혼자 노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해야 하나. 활동적인 아이와 매일 방과 후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점점 부담되기도 했다. 없었던 체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즐겁게 보내려고 한 아이와의 시간이 점점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행착오를 겪은 후, 억지로 아이와의 보내는 시간을 늘리지 않았다. 양보다는 질! 몇 시간을 아이와 보냈나를 중점에 두지 않고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아이와 시간을 함께 했는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시간: 늘어난 자유시간과 비례하게 늘어난 나의 게으름. 시간의 여유로 인해 모든 일을 천천히 하게 되었다. 언제나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나도 아무런 약속도 없고 데드라인도 없으니 정신적인 자유로움에 도취하여 모든 일 처리를 천천히 하게 되자 자꾸 뒤로 미루는 습관이 들었다. 오늘 안 해도 오늘 안 끝내도 내일도 난 시간이 많은데 하면서 해야 할 일들이 점점 쌓이게 되고 게을러지는 일상에 나 자신이 불만스러웠다.
인생 처음으로 해보는 백수 생활. 아무것도 안 하면 마냥 좋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평생 한 번 있는 이 자유시간도 난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제나 무언가를 바쁘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목표가 사라졌다. 목표가 사라지니 의욕도 같이 상실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슬기롭게 백수생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