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에 왔다. 리옹 근처에 있는 그르노블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갈 계획이었지만 사정이 생겨서 리옹에 머물게 되었다. 3박 4일. 강제 여행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이라 뭐부터 해야할지 몰라 리옹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아는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10시 쯤 내가 예약한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밤은 깊어갔지만 거리는 여전히 밝았고 북적였다. 처음 오는 도시, 더군다나 밤이라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첫날 예약한 숙소는 번화가보다 살짝 더 올라가야했다. 낮 시간대의 그 공간이 마음에 들어 예약을 했지만 밤에 도착을 했고, 아침에 체크아웃을 해야하다니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첫날이 지났고, 아침이 밝았다. 두번째 숙소에서는 이틀밤을 예약했다. 번화가에 있었고, 공간도 마음에 들었다. 첫번째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두번째 숙소에 체크인 하기 전 몇 시간동안 도시를 둘러보았다. 가을의 유럽은 산책하기 좋았다. 사람들은 제각각 멋지게 차려입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창에 비친 나의 크록스를 보며 조금 부끄러웠다. 나의 크록스는 일년이라는 시간동안 나의 발에 붙어있다시피했다. 베이지색은 이미 브라운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저 이곳을 거쳐 태국으로 그리고 집으로 가기 전까지만 이 신발이 버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크록스는 나에게 발을 보호해주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나와 함께한 시간이 있으므로 쉽게 버릴 수는 없었고, 새로운 신발을 사기도 애매했다.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발에 맞는 신발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이 신발은 일년동안 닳고 닳아 내 발이 아니면 맞지 않게 변형이 되었다. 가끔 물기가 있는 타일을 지날 때는 조심해야한다. 밑창이 맨질해져서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신발의 안쪽은 발바닥에 쓸리고 쓸려 검게 타고 있었다.
길을 걷다보니 화려하진 않아도 예쁘게 꾸민 사람들과 대놓고 화려하게 꾸민 이들로 가득했다. 여행을 온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을 지내는 사람들도 단정했다. 그 중에 하나, 더러워진 크록스를 신고 내가 손수 지은 나시티와 린넨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 바로 나였다. 그래도 애써 골랐다고 생각했던 옷인데, 그들 사이에 있자니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왜였을까. 더군다나 안경은 그것을 더욱 가중시켰다. 나는 시력이 꽤 좋지 않아서 안경이나 렌즈를 껴야하지만 요즘엔 주로 안경을 쓴다. 두꺼운 안경이 세상과의 두꺼운 벽이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쇼핑을 할 내가 아니다. 이미 다 계산된 백패킹이었으므로. 나는 리옹 시내를 이렇게 활보하게 될 것은 계산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 것도 계산하지 못했다는게 맞겠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것이 여행이 주는 묘미이기도 하고,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조금 더 자란 것 같은 나를 만나는 이유이다. 안정된 울타리에만 있고 싶은 우리의 마음과는 반대되는 행위이지만 왜 우리는 이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나도 집에만 있고 싶었지만 왜 나오니까 이렇게 좋은 것일까. 그와 동시에 왜이렇게 집에 가고 싶은 것일까.
비록 더러워진 크록스지만 발이 꽤 편하다.
강제로라도 나오니까 좋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