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hi Mar 17. 2024

[필리핀|시아르가오] 일주일이 5개월이 된 여행의 끝

혼자서는 못 했을 아니 안 했을 여행

치앙마이에서 떠난 지 꼬박 이틀이 거려 도착한 시아르가오. 간단히 나의 루트를 이야기해 보자면, 치앙마이에서 방콕, 방콕에서 마닐라, 마닐라에서 세부까지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니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그날 저녁 세부에서 수리가오로 가는 나잇페리를 탔고 다시 아침이 되어 수리가오에서 시아르가오로 가는 마지막 페리를 탔다. 페리에서 내려 다시 삼십 분가량을 달려 예약해 둔 숙소에 마침내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예약한 숙소였다. 호기롭게 예약한 숙소에 들어가 씻고서 하루 전에 도착한 루카스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변기가 막혀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몰려오는 냄새에 의아해하며 변기 커버를 연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고, 다시 커버를 닫아두고 숙소 예약 어플을 켰다. 직원에게 얘기하기도 전에 나는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여기는 안 되겠다며.



What a life!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친구의 숙소 바로 옆에 있는 곳에 방을 잡을 수 있었다. 항상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했던 터라 이번에도 여러 숙소들을 옮겨가며 지내야 했지만 그건 더 이상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틀 만에 지구의 또 다른 편에서 만나게 된 친구가 반가우면서도 신기했다. 이렇게 우리의 여행 아닌 일상이 시작되었다.


처음 며칠은 섬 전체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 구경을 했고, 다음 날부터는 치앙마이에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곳을 여행한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를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 해가 질 때면 북적이는 선셋브리지의 초입을 지나 끝자락의 다리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주변의 섬으로 투어를 떠나거나 서핑을 다녀왔다. 매일 새로운 카페와 식당을 가다가 결국에는 가장 마음에 드는 곳들로 골라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곳에서 만나곤 했다.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즈음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여행자의 숙명. 헤어짐. 매일이 만남의 연속이었지만 헤어짐의 연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헤어짐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나에게 독일 친구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빈자리가 클 것을 알기에 조금 이기적이지만 나는 루카스보다 먼저 떠나는 비행기를 예매해 둔 것도 사실이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에게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므로.



나의 마지막 주말 아침에는 선셋브리지 너머에 있는 카페에 갔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우리는 헤어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날까지 평소와 같은 보통의 일상들을 보내다 떠나고 싶었다. 이른 아침 비행기였던 나는 그 전날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날 아침, 루카스가 물었다. 오늘 무얼 하고 싶으냐고. 나는 그냥 평범하게 지내자고 했다. 그러자 친구가 물었다. “그럼 저녁은 다른 데서 먹을까” 나는 그냥 항상 가던 데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저녁 먹고 아이스크림에 칵테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좋지”


우리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저녁을 먹기 전에 마지막으로 선셋으로 보며 달리기로 했다. 10km. 달리기가 느린 나는 친구를 먼저 앞장서서 보내고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그러다 친구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 길을 달리며 5개월 동안 이어진 나의 여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여행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이 친구와의 추억들도 천천히 뒤를 이었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이 성장했다고 느낀 기간. 이 시간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또 이렇게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남더라도 결국엔 모두가 떠날 테니.


저녁을 먹고 항상 가던 아이스크림 집에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한 뒤에 루카스와 둘이 칵테일을 한잔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달이 환하게 떠있는 바다 옆 바에서 하우스 칵테일을 하나 주문하고 칵테일을 다 마실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 칵테일이 끝나면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인지 조금 천천히 마셨던 것도 같고, 그냥 그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던 것도 같다. 어느 때처럼 나를 숙소 앞에 내려주고 우리는 인사했다. 굿 나이트.



https://youtu.be/JdoSnsoBDco? si=LRdUKsa3 UogZD-5Y



이전 19화 [치앙마이] 다시 오려고 일부러 놓고 간 게 있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