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나와 친구가 되어주었다
인도네시아, 쿠타. 친구들과 새로운 식당이나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만으로 한 달이 금방 지나갔다. 모두가 쉬는 주말이면 아침 일찍 패들을 치러 가기도 했고, 하루종일 해변가에서 수다를 떨었다. 점점 친구들은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고, 나와 한 프랑스 친구, 그리고 Nav만 남았다. 전보다 조용해지긴 했지만 적극적인 프랑스 친구 덕분에 분주히 돌아다니는 건 여전했다.
프랑스 친구마저 떠나버린 그날 저녁, 나와 Nav은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어둑해져 버린 쿠타 해변에 갔다. 모두가 떠난 뒤에 느껴지는 적적한 침묵만큼 Nav의 호주식 영어 발음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치즈케이크에 소주를 마셨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조합이지만 내가 좋아한다. 달달한 디저트에 쌉쌀한 소주 한 모금. 인도네시아의 소주 가격은 한국의 10배 정도 된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소주를 산 게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먼 옛날이지만, 가끔 친구들과 한국은 물보다 소주가 싸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던 걸 기억한다. 인도네시아의 소주는 160 IDR, 한국 돈으로 16,000원 정도 되는 가격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지이지만 오늘만큼은 괜찮다 싶었다.
나는 해가 모두 다 가라앉아 어둑해진 루프탑에 앉아 치즈케이크와 소주를 꺼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불빛이라곤 달빛 밖에 없었다. 굉장히 로맨틱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앞을 더듬거리며 가방을 놓기 적당한 자리를 찾았고, Nav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다만 거기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만 있을 뿐. 실제로 그가 거기에 있다고 느끼게 해 준 것은 그가 가져온 블루투스 스피커였다. 친구들이 떠난 자리를 음악으로 채워 넣었다.
처음 며칠은 Nav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일을 하는 그를 더 이상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용해진 나의 일상에 아침 조깅과 카페, 요가를 꾹꾹 담아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을 때면, Nav에게 이번 주말엔 바다로 놀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평일에는 자주 가는 카페가 생겼고, 그곳에서 친구를 하나 둘 사귀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놀랐던 사실 중 하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굉장히 반겨준다는 것. 나보다 더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한국 음악과 드라마에 무지한 나 자신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양 친구들은 대부분 현지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말하곤 했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었다. 카페나 식당, 하물며 길을 걷다가도 나는 현지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너무 친절하고 다정했다. 항상 나에게 무언가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묻거나, 그들이 쉬는 날이면 무언가를 함께하고 싶어 했다. 여행이 아닌 현지 일상을 살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엄청난 로컬 식당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을 나누었고, 그들과 생활하며 인도네시아 말을 배우는 것이 더 수월했다.
현지 친구들은 나에게 무엇이든 나누어주고 싶어 했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했다. 내가 단지 한국인이라서 그랬을까.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좋은 한국인으로 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