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것처럼
그가 친구들과 지내는 숙소는 작은 빌라. 방 2개에 오픈 키친, 그리고 작은 수영장이 있는 구조이다. 어둑해진 수영장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저녁 메뉴는 수제버거, 나는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리고 이어서 디저트로 추로스를 먹고 나니 10시 가까운 시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직까지 내가 예약한 숙소에 체크인을 하지 않은 상태.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전에 묵었던 곳이었다. 친구에게 내일 보자라는 말을 남긴 뒤 다시 오토바이에 올랐다.
다음 날 아침 5시 30분. 친구가 매일 아침 간다는 카페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내가 묵는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남짓. 창구 해변 바로 앞에 위치한 타임스라는 카페인데, 아침 6시부터 연다. 아직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자니 인생이 참 재밌다는 생각이 스친다. 일 년 전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아니, 몇 개월 전 이곳을 혼자 여행했을 때도 나는 몰랐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더군다나 쓸쓸하게 느껴졌던 이 거리가 설렘으로 덮일 줄은.
카페 근처까지 갔을 때도 거리가 어두워서 진짜 6시에 여는 것인가 의아했지만, 가게 직원들이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주위를 둘러보고 발길이 닿는 곳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아직 친구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5분쯤 흘렀을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자기가 매일 앉는 곳이라며. 우연의 일치겠지만 왜 우리가 친구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날이 차츰 밝아올 때까지도 말없이 앉아있었다. Alone but together. 우리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도 서로에게 지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것처럼 서로의 거리를 존중해 준다. 하지만 아침시간은 조금 부드러운 편이다. 부드럽다고 말하기 어색한 면이 없잖아 있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인 8시 혹은 9시까지는 말랑한 정적이 이어진다. 말랑한 정적이라 함은 상황을 봐서 언제든 말을 걸 수 있는 상태. 그 이후에는 얄짤없이 단단한 정적. 내가 느끼는 바로는 그러하다. 수개월간 자연스레 내가 터득한 우리의 시간 활용법, 혹은 우정 활용법이랄까.
나는 대게의 시간을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를 쓰며 아침시간을 보냈다. 주로 내 경험에 의거한 것들이다. 그림이라 하면, 작은 스케치 같은 것인데 기억나는 순간들을 한 장에 담는다. 나의 시선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시선을 빌릴 때도 있다. 그에 반해 일기는 전날의 경험에 의한 감정의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게으름이 불러온 결과이지만, 나는 전날의 감정을 다음날 아침에 담담히 담아내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저녁의 감성은 나의 감정들을 더 깊숙하게 바라보게도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어제와 잠이라는 경계를 두고 난 뒤의 아침은 이성적으로 어제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워낙에 감성적인 나로서는 그 마저도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 덜 감성적인 상태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 않는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사실 혼자 아침을 맞이하게 되면, 이러한 절차들도 생략하는 날들이 많다. 그래서 내 수첩을 보면 한동안은 꾸준히 일기가 이어지다가 몇 달은 또 공백의 상태이다. 나이가 들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 면들이 바로 이런 것 같다. 몇 달 뒤에 동일한 수첩을 열어 다시 무언가를 적어나갈 참이면,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멋쩍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어색하게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내 맘 한편에서 오랜 기간 수첩을 열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꿈틀댄다. 수첩 속의 나는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 오늘은 오랜만에 수첩에게 안부인사를 건네어야겠다. 어떤 변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