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순식간에 더워진다, 비 오는 날은 좀 춥더니 해가 뜬 날은 덥고,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나는 또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해 나한테 옮겼을 때도 아이는 하루만 아프더니 멀쩡 했는데 나는 2주를 몸이 안 좋아서 고생을 했다 백신도 맞고 부스터도 맞았는데, 운이 없지 싶다, 최근에 아이 챙기느라 내 몸상태를 잘 못 본 건지 목이 또 간질간질하다
따듯한 옥수수차를 주전자에 끓여본다, 결명자 씨앗 몇 개, 옥수수 한 줌을 넣고 물이 끓기 시작하면 10분에서 15분 정도 더 기다렸다가 식히면 일주일 정도 마실수 있는 보리차가 만들어진다, 날은 더운데 따듯한 물이 웬 말인가 싶지만 그래도 이렇게 먹으면 목이 좀 가라앉는다
지난주까지 봄 옷을 정리를 좀 해보려다가, 회사 문제도 있고 해서 일주일을 미뤘더니 일이 좀 많아졌다 아침 일찍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검은색 빨래들을 한번 돌리고 이불과 베개를 돌리기 시작하자 아이가 일어나 안긴다
"아빠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오늘 일이 많아서 그래요 봄이 왔으니 이제 봄옷을 꺼내야 할 것 같아요 도와줄 거죠?"
"아니요."
단호히 안된다는 말에 푸앗 하면서 딸의 볼을 꼬집한다
"안돼요 도와줘야 해요."
화장실에서 얼른 씻고 나오라고 하며 아침에 좋아하는 첵스 마시멜로를 꺼내 놓고 우유와 그릇을 식탁 위에 세팅을 해준다, 조용해서 화장실로 따라 들어가 보니 물을 틀어놓고 졸고 있다, 물을 손에 받아 얼른 얼굴을 닦아준다, 밤새 푹 주무셨는지 침 자국이 양 볼 옆에 가득하다 힘을 조금 줘서 뽀드득 하자 아픈지 얼굴을 찡그린다
"아파요."
"좀만 참아요 침 자국이 목까지 나있어요."
아이를 마저 씻기고 나오니 해님이 베란다에 한가득 들어왔다, 작년 11월 초까지만 해도 17평 남짓한 집에서 셋이 부둥켜안고 잤었는데 이제는 베란다 있는 집에 빨래도 널수 있고 좋은 것 같다, 아내랑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지만 그냥 생각만 한다 4년 전에도 내가 숙이고 들어가서 결국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런 일방적인 관계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아이가 닦고 나오자 첵스를 우유에 말아 주고 옆에 앉아서 빨래를 개기 시작한다, 두꺼운 옷들은 따로 빼두고 얇은 옷들만 차곡차곡 모은다 아이가 먹는 동안 아이 방에 들어가 침대 매트리스를 치운다 매트리스 아래에 나무로 된 커버를 열면 안쪽에는 서랍장이 있다 얇은 옷은 이제 빼고 겨우내 입었던 두꺼운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본다 사이즈가 작은 것 같은 옷들은 아이에게 입혀보고 안 맞는 게 있으면 봉투에 담아야지
"공주님 다 먹었어요?"
"아직이요."
"TV보다는 먹는 거에 집중해야 해요?"
"네."
옷 정리 중
아이 침대 아래의 서랍장이 생각보다 작다, 그리고 바지보다 상의가 많아서, 바지 자리는 남아도는데 상의 자리가 부족해서 원피스 종류는 바지 자리에 넣어본다 작년에 샀던 사이즈 큰 옷들은 택을 떼고 빨래 바구니에 던진다 한번 빨아서 입혀야지
아이 방 창문을 열고 밖을 본다, 시원한 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게 참 신기하다 전에 살던 집은 앞뒤로 문을 열었어도 후끈후끈거렸는데 저층이라 지하주차장에서 차가 오르락내리락할 때 나는 삐용삐용 소리가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이내 또 익숙해진다
멍하니 밖을 본다, 아직도 종종 딸과 나 둘만 있는 게 꿈같을 때가 있다. 연애부터 결혼생활까지 합치면 10년 정도 여서 그런 건지, 나이가 40이 다 돼가는데도 종종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꾼다. 좋아서라기보다는 많이 생각해서겠지 아내가 소장을 보냈다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도착할 것 같아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할 시간이 더 충분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내가 먼저 보냈다는 건 아내는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뜻 일 것 같아서 씁쓸하다
상담사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도 싫고 하기도 싫어서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선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하는 건 맞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사람들은 그거 마저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사람이라는 게 참 어렵네요라고 대답했었다
'어렵죠, 정답이 없으니까요.'
'정답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 속에서 사는 거니까 혼자 정답을 내면 안 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가슴이 먹먹하다,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는 건 여전하다, 좋은 이별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갑작스레 전화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어머니였다
"네."
"어 잘 있니? 밥은?"
간단히 안부를 물으시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오신다 어머니는 네가 나이가 아직 40이 안되었는데 아이를 그냥 와이프한테 주고 양육비 주는 게 어떻겠냐고 하신다 아이도 중요하지만 네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대답을 안 했다 나한테는 아이가 중요했고 엄마한테 가는 것보단 나랑 있는 게 좀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이야기를 한다
"네가 키우는 거 아니라고 니 딸 아닌 것도 아니고, 나는 네 딸도 물론 중요하지만 네가 그보다 더 중요해 너 아직 40도 안되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몰라, 잘 생각해 보고 소장 오면 나한테도 보내줘."
어머니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앉아서 옷을 정리 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옆에 오길래 한번 꼭 안아준다 어찌 이 예쁜 아이를 놓으란 말인가, 눈물이 찔끔 낫지만 후딱 닦는다
봄이 왔는데 아직도 마음속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아이의 방을 정리하려고 들어왔는데 사실은 나 자신조차 정리가 안되고 있었다. 어지럽고 얽혀있는 내 마음속의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기억과 감정마저 망각이란 가위로 싹둑 잘라내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천천히 차근차근 슬픔도 화남도 다 느껴보며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 해서 풀어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