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큰 무대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남호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너는 왜 이런 스피치 훈련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바로 나의 행복을 위해서요, 사람들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반드시 이 문제점을 뿌리째 뽑아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명강사가 될 거야. 두고 봐라! 저 미래의 꿈을 위해, 미래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축복을 위해 힘차게 달려 나가자! 레디 고!”
나는 스피치 학원의 이사장에게 90도로 인사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이사장은 박수를 치며 흥분된 목소리로 나의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을 훌륭히 발휘한 것 같아 나도 기뻤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큰 실망을 느꼈다. 경력직이 아니므로 인턴 3개월 동안 월급이 30만 원이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당장은 차비조차 부족한 상태라서 그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학원 측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며, 마음의 결정을 내리면 연락을 달라 하고 미팅을 마무리했다.
설마 월급이 진짜 30만 원일 리 없겠지, 열심히 하면 더 주겠지 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입사를 결정했다. 출근 첫날부터 나는 청소와 전화 받기, 잡일, 잔심부름 등을 하루 10시간씩 하며 일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금액인 30만 원이 입금된 것을 확인했다. 믿기 어려운 현실을 직접 보고 나서야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의 인턴 생활을 마친 후, 이사장이 나를 불러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내 성실한 모습에 또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최저 시급이라도 맞춰주고 싶었지만, 원장님이 월급을 60만 원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었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무척 화가 났다.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강사 일을 시작한 게 아닌데, 자존심도 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3개월 동안 지켜본 원장의 교육 철학이 나와 매우 달랐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대학생이 찾아와 원장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는 상대방의 눈을 못 쳐다보겠고, 시선을 받는 것도 두렵다고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원장은 단체 반 수업을 수강하면 개선될 것이라고만 답했다.
대학생이 좀 더 구체적인 답변을 요청했지만, 원장은 수업만 들으면 무조건 좋아질 것이라며 훈련만이 답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저 고민의 증상은 시선 불안증이고, 원인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상담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대학생은 5분여간의 답답한 대화에 한숨을 내쉬더니 고민해 보겠다고 말한 후 학원을 나갔다. 그 뒷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다. 하지만 원장은 상대방의 눈을 왜 못 쳐다보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수강생을 놓쳤다면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나는 원장에게 퇴사 의사를 밝혔다. 원장이 붙잡으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언급하며 마음을 약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원장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말을 내뱉었다. 나중에 학원을 차리게 되면 부살 말고 경남 창원이나 마산, 대구쯤에서 창업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짧은 첫 강사 생활은 막을 내렸다.
나는 더 큰 무대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의 스피치 학원에서 강사 양성과정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기본을 닦고 성실히 임하면 부산의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스피치 강좌를 개설해 준다는 말에 목표를 세웠다.
그랬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강의를 들었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임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스피치 관련 경력도 없고, 학력도 고졸인 나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으며, 어느 곳에서도 나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그리고 스피치 전문기관 대표에게 또다시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남호야, 이 바닥이 원래 냉정해. 학력도 보통은 석사 이상을 많이 선호하고. 너는 고졸이라서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구나. 미안하다.”
하, 바보 같은 이남호! 이토록 냉정한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터널 같은 긴 어둠 앞에서 앞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가족은 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컸기에 이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수입은 0원이었다. 당시 김창옥 강사는 성악가 출신으로 교회에서 보이스 트레이닝 프리랜스를 하다가 책을 쓰고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등 일타강사가 되었다.
김미경 강사도 40대 중반의 여성 강사로서 승승장구했다. 내가 대학만 나왔어도… 여유 자금이 조금만 있었더라도… 하며 스스로 자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