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8일 화 : 리추얼 그룹코칭과 맥주 만들기, 중앙동 카레집
어제는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소개받는 시간이었다면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내가 참여한 순천한달살기 프로그램의 주제가 리추얼이었기에 첫 공동 프로그램은 이 단어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고 각자의 리추얼을 정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걸 돕기 위해 정은옥 코치님이 오셔서 그룹코칭을 진행해 주셨다. 그룹 코칭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의 리추얼 목표와 간단하게 요약된 삶들을 알게 되었다. 가장 좋았던 건, 사람들 각각 살아온 삶도, 리추얼 목표도, 되고 싶은 이상향도, 말할 때의 제스처도, 말투도, 옷도, 너무나 달랐다는 점이었다. 8개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우린 그룹코칭 시간 동안 뚜렷한 목적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서로 대화하면서 에너지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정한 나의 리추얼은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분명 내 일상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다.
*나의 리추얼*
1). 아침에 따듯한 물 한잔과 가벼운 스트레칭
2). 삼시세끼 잘 챙겨 먹기 (feat. 규칙적인 시간 엄수, 주전부리로 배 채우지 않기)
3). 자기 전에 일상을 돌아보며 간단한 일기 쓰기
순천에서의 내 매일은 이렇게 채워갈 생각이다. 나는 그렇게 '나무'가 될 거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는 사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람,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무한한 세계를 가진 그런 '나무'같은 사람이. 이게 나의 북극성이다.
오전 그룹코칭 시간을 마치고, 오늘은 '행복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가 기대했던 전라도 백반의 정석 같은 맛이었다. 모두가 전라도 손 맛과 찐 로컬 분위기에 만족해하며 나온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 식사를 먹으면서 대화를 하다 느꼈다. 어제저녁 숙소로 들어갈 때엔 서로 존댓말을 하던 사람들이 오늘 숙소에서 나올 땐 어색하지만 서로 편하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너나 할 거 없이 룸메이트끼린 말을 편하게 하기로, 어젯밤에 각자의 방에서 그런 합의가 이루어졌던 거 같다. 하기야, 한 달 동안 동거동락할 상대이니 존댓말을 고수하긴 힘들게 분명했다. 절대 말을 놓지 않는 나조차도 어제 룸메이트와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 덕도 있겠지만, 함께 수제 맥주 만들기 체험을 하면서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거 같다. 역시 친해지는 데엔 모두 다 같이 고생하는 게 제격인 듯싶다. 더운 여름날, 4시간이 넘도록 재료를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끓이고 식히길 반복하고, 설거지하고, 직접 넣을 홉까지 선택하며 만든 맥주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하나는 맛이 밍밍한 기네스여서 밍기's고, 하나는 중간에 실수로 홉을 빠트려서 홉's가 되었다. 맥주를 만드는 과정은 말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앞서 말했듯, 홉을 빠트리기도 했고, 전선을 켜지 않아서 냉각이 제대로 안 되는 일도 있었다. 모두가 지쳐있었으나 짜증 내는 사람이 없어서 이런 실수들은 화를 내는 기폭제가 아니라 웃음 버튼이 되었다. 고되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뭣도 모를 때 이런 힘든 작업을 먼저 하게 되어 다행인 거 같았다.
나와 룸메가 다이소에 간다고 하자 다른 언니들도 같이 가자고 했다. 시간대가 다이소 갔다 오면 딱 저녁식사 무렵이기도 했고, 대표님께서 중앙동에 맛집도 많다고도 했으니 이참에 같이 저녁을 먹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다이소 쇼핑을 마친 후 세진, 세철 오빠들에게 연락해서 중앙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두 사람은 놀랍게도 뛰어서 중앙동으로 왔다. 이날의 메뉴는 옥리단길에서 유명한 '히요리'라는 일식집이었다. 주력 메뉴인 카레부터 시작해서 사케동, 대창덮밥, 그리고 크로켓까지, 모두 맛있었다. 민 언니는 많이 배가 고팠던 건지 대창덮밥과 카레, 이렇게 두 가지 메뉴를 골랐다. 그 덕에 나도 대창덮밥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이곳이 특이했던 건 식기 하나하나 다 달랐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나가자마자 사복을 입은 직원들이 우리의 테이블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감시간 3분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직원분들께 감사했다.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니 주변 풍경이 너무 예뻐서 저절로 발길이 작은 하천길로 향했다. 사진은 조금 스산하게 나왔지만 중간중간 강아지 산책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명도 간간히 있어서 걷기 딱 좋았다. 나와 룸메는 한 살 차이로, 놀랍게도 내가 한 살 많다. 나는 룸메가 첫 동생이고, 룸메는 내가 거의 첫 언니라고 했다. 우리 둘 다 한 달 살기 참여자 중에 막내 축에 속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둘 다 낯가림이 없는 편이 아닌데도 하루 만에 빨리 친해졌다. 나와 룸메는 이 길을 한참 걸어 숙소로 가면서 일 초도 쉬지 않고 웃었다. 웃으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길을 걷다가 배꼽을 잡고 웃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다시 저렇게 별 거 아닌 일에 배를 잡고 웃을 날이 있을까, 싶었는데 내가 지금 그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나는 내가 농담을 하고, 다른 사람과 친해지고, 웃고 떠드는 법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학생들을 보며 부러워했었는데. 나는 이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낙엽 하나 굴러가지 않아도 룸메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해질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는데, 벌써 이렇게나 빨리 편해졌다. 신기한 일이다.
룸메가 계단을 올라오다가 세진, 세철 오빠들에게 술 마실 거면 테라스로 올라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래서 올라갔더니만 오빠들이 없길래 농락당했다며 분해하고 있었는데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 다시 올라가 보니 저런 상태였다. 어디서 난 건지 분위기 있는 조명을 켜고, 단체복을 커플티처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웃겼다. 그런데 세진, 세철오빠와 어색한 사이여서 차마 놀릴 순 없었다. 다시 이 사진을 보니, 한 달 살기 팀 비공식 커플로 불린 이유를 알 거 같다. 두 오빠들은 우리가 말하기 전까지 옷이 비슷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고 했다. 두 사람은 한 달 살기 팀 중 유일한 남자이고, 같은 나이이고, 성격이 잘 맞아서 빨리 친해진 거 같았다. 나와 룸메는 두 사람의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조금 어색하기도 해서) 잠깐 앉아있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도 너무 기대된다. 잠들기 아쉬울 정도로. 아직 2일 차지만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 여기서의 하루는 내가 예상했던 모든 것들을 뛰어넘게 좋았다. 만약 내 두려움과 걱정이 모든 걸 이겨버려서 순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신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순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선정되고 나서도 마지막에 변심해서 이곳에 오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전처럼 계속 용기 내지 않는 선택을 했었다면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일상을 지속하고 있었을 테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했던 무수히 많은 걱정들과 고민들, 예상했던 상황들과 감정들은 이곳에 온 지 이틀 만에 모두 쓸데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역시, 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