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일 : 죽도봉 산책, 27장 나들이, 방아잎전까지
어제 고기를 360g씩 먹었던 덕분인 지는 몰라도 아침부터 호랑이 기운이 샘솟았다. 새벽 5시 정도에 눈이 저절로 떠졌는데 몸이 너무나 개운해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빠르게 준비하고 러닝을 뛰러 나왔다. 운 좋게도 동천을 뛰면서 처음으로 아주 작은 무지개를 발견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렇게 동천 러닝 6km를 뛰었음에도 아직 7시가 채 안되었고, 지금 들어가면 룸메친구가 잠에 깰 거 같아 죽도봉을 한 번 올라가 보기로 했다. 딱 정상 찍고 오는데 왕복 40분이 걸릴 예정이었고, 그때 즈음이면 조식을 먹기 위해서라도 룸메는 일어나야 할 시간이니까. 죽도봉까지 가는 길은 오르막 경사가 매우 심했지만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다. 풀잎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집들은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귀여우면서 예뻤다. 기분이 너무 좋아진 나머지 오르막길을 살짝 뛰면서 올라갔다. 정상으로 가면서 나는 오늘 하루도 너무 기대가 됐다. 우선, 빨리 돌아가서 룸메친구에게 무지개를 본 것과 죽도봉을 오른 것을 이야기해 주고 나서 볼 그 친구의 반응도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8시면 꼬르륵하고 배꼽시계를 울리는 배를 채울 조식메뉴도 기대가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침 일찍 눈을 뜨는 건 하루하루가 너무 설레는 일 가득이라서, 그 마음 때문에 그런 거 같다.
오늘은 아랫장 장 서는 날이라 구경할 사람 모여 같이 가기로 했다. 매 월 2와 7로 끝나는 날에만 서는 장인데 호남 최대 규모라고 한다. 그 말에 걸맞게 정말 장이 생각보다 크게 서서 깜짝 놀랐다. 길은 강남역 거리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았고, 장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순천 사람들은 다 거기 모인 것 같았다. 마늘이 거의 내 키의 절반까지 올 만큼 쌓여 있었고, 거리마다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심지어 가격도 너무 저렴했다. 수박은 만 원에 팔았고, 핫바는 11개에 만 원이었다. 모든 음식이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찐 옥수수는 말도 안 되게 쫀득했고, 핫바도 쫄깃했다. 꽈배기와 만두, 도넛, 고로케, 사 온 거 전부 다 다시 한번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1인 당 4000원 정도 가격으로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이런 곳은 다 같이 가야 먹고 싶은 음식을 다양히 맛볼 수 있다.
아랫장 나들이를 마치고 나서 내 룸메친구와 몇몇 사람들은 순천드라마세트장을 갔다. 나는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선 순천역 쪽을 천천히 구경했다. 그곳에 있는 이마트에서 버섯구이 시식도 하고, 다이소에 가서 돗자리를 할 만한 패브릭 포스터를 사고, 다시 중앙시장 쪽으로 넘어가 순리당에서 에그샌드위치를 사고 돌아오니 어느새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오늘은 혼자 숙소에서 여유롭게 쉬려고 했는데 시간을 보니 그것도 어렵겠다 싶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빠르게 씻고 나왔으나 룸메가 도착해 버렸다. 그렇게 안타깝게 내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내 탓이 크다. 그래도 반가운 건 반가운 거라, 룸메친구와 미뤄둔 수다를 조금 떨다 보니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룸메친구랑 말만 하면 시간이 어쩜 이리 금방 가는지.
룸메는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나는 집 근처 '비샌드위치'에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포장해서 먹기로 했다. 원래 6시 즈음 포장해 올 생각이었으나 오후 5시만 넘어가면 가게들이 셔터를 닫아버린다는 소문을 듣고선 헐레벌떡 샌드위치 집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사장님이 마감하기 직전에 마지막 주문을 넣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 사장님은 스테이 두루 사장님의 아는 지인분이셨다. 그곳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다른 방 언니들을 만나서 샌드위치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사장님과 수다 좀 떨다가 같이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샌드위치만 먹는 게 마음에 걸리셨던 건지 숙소 사장님의 어머님께서 얼른 방아잎 전을 부쳐주셨다. 한국의 고수라고 불리는 무슨 잎으로 만든 전이었는데 너무 향긋하고 맛있어서 샌드위치가 먹기 싫어졌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 거지. 맛있는 전을 먹으니 한식러버인 룸메친구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룸메의 몫까지 내가 먹었다. 인생은 역시 타이밍.
그렇게 또 하루가 끝나버렸다. 나는 매일의 하루가 무료하고 재미없고 할 일이 없어서, 지루해서 죽겠는 사람이었었다. 하루의 그 24시간을 보내는 게 내겐 너무 버거웠던 사람이었는데 이곳에서의 시간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더디게만 가던 초침이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걸까? 나는 여기서 하루하루가 매번 색다르다. 매일이 새로운 일 투성이라 아침은 매번 설레고 저녁은 매번 아쉽다. 하루가 지나는 게, 시간이 흐르는 게 너무 아깝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원했던 '일상의 활력과 매일의 설렘을 되찾고 싶다'는 말이 벌써 실현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다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내가 다시 이런 시간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니, 나는 하루하루 이곳의 모든 것으로부터 치유되고 있는 중이다.